2021. 12. 19. 19:1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3~21)
한 청년이 예수께서 설교를 하고 있는 중간에 불쑥 나섰다. 그리고는 형이 유산을 나누어 주지 않으니 그것을 좀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랍비들에게는 일반 서민들에 대한 재판관 역할도 했었기에 청년의 요청은 있음직한 일이었다. 당시 상속관습은 형이 3분의 2를 갖고 동생이 3분의 1을 갖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형이 동생에게 줄 3분의 1마저도 착복을 한듯하니 동생으로서는 그것을 되찾아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소문난 랍비가 왔다기에 찾아와 설교를 듣는 도중에 부탁을 한 것이다.
생명과 우상
청년의 이 당연하고도 정당한 요청을 예수는 ‘탐심이 가득한 자’라는 표현으로 면박을 주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그의 요구가 옳으냐 그르냐를 지적함이 아니었다. 정당해 보여도 그 요구가 생명과 무관하면 그것이 탐심이요 우상숭배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현장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 하나를 언급했다. 넉넉한 소득을 올린 어떤 부자가 내심 ‘지금 창고로는 이 소출을 다 담아 둘 수 없으니 더 큰 곳간을 지어 내 소유를 모두 담으리라. 노후 준비가 완벽하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노후대책,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일한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런 부자 비유에 다음과 같은 언급을 끼어 넣는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생명, 영원한 생명,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다. 그런데 그 생명은 돈으로 살 수가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가치를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인기나 명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한다. 힘과 가치를 모으고 모으면 그것이 생명이 될 수도 있다고 억측까지 한다. 그렇게 살기에 자기 소유나 명성이나 인기가 상실되면 죽을 듯이 비통해 한다. 인생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돈? 사람들이 인정? 그런 것들은 한시적이고 유한하다. 그런 것에 통제되고 장악된 인생은 그것들과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사망이고 죽음이다. 하지만 생명에 통제되고 장악된 인생은 오늘 삶에서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도 현실에서 영생을 산다. 분명, 생명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예수 안에 먼저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으로 만물도 창조되었다. 그러니 예수와 관계없는 존재는 실상, 티끌일 뿐이다. 생명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생명이라 여기는 세상 힘이나 명성을 추구하며 사는 티끌들 모습이 우습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 함은 무엇인가? 산상수훈에 그 구체적 내용이 소개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여기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는 어구를 직역하면 ‘땅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어구도 ‘하늘의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이니 땅의 보물은 땅에 쌓일 수밖에 없고 하늘 보물은 하늘에 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땅의 보물이 무엇? 자기를 위한 수고과 가치와 인정을 추구하는 것, 거기서 획득한 수확물이다. 반면, 하늘의 보물은? 밭에 감추인 보화로 예수, 그러니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삶이다.
땅의 보화와 하늘의 보물
보물을 땅에 쌓는 사람들 마음은 땅 보화에 연결되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이 땅의 보화와 운명을 함께 한다. 좀이 먹고 녹이 슬며 도적에게 잃기도하는 그 보화와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다. ‘나를 위하여’의 목록들로서 선행, 헌금 등으로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챙기려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땅에 보물을 쌓고 곳간을 늘이고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였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 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3-26)
이로서 성경이 말하는 부자의 개념이 명확해졌다. 부자는 단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자기라는 우상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 우상 빛내기에 힘을 쏟는 사람이 부자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 모든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모두가 부자이다. 인간의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하여 성경은 돈, 재물 등의 단어로 축약하고 상징하여 부자라 불렀다. 그런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셨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당시 현장에서 듣던 제자들도 쑥덕거렸었다. ‘결국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겠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이다. 세상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한 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 다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부정과 하나님의 은혜가 담긴 복음이다.
그 순간, 베드로가 나대며 말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지 않았습니까? 그런 우리에게는 어떤 상이 준비 되어 있나요?’ 무엇을 얻기 위해 버리는 것, 그것 역시 탐심이고 우상 숭배이며 악이요 부자임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인간이 그 어떤 멋진 일, 선한 일을 한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가 될 수 없으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 하셨다. 사실, 인간의 선악 기준이란 것이 우습고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제 것을 주장 할 수 있으며 제 소유와 행위를 쌓아 안전과 인기와 명성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자기 가치를 얻고 확장하려고 예수를 이용하려던 제자들은 최후 만찬에서까지 누가 더 크냐로 기싸움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선의 기준은 그리스도이다. 은혜에 의해서만 산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고백으로서 가능성을 얻고 산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그렇게 새로 난 하늘 사람은 이 세상 소유를 어떻게 볼까? 바울의 경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보았다. 하지만 그랬던 그 조차도 자기 고백만큼 잘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죄인중의 괴수요 사망에 묶여 있는 존재라 통회 했었다. ‘돈, 성공’ 속에 들어 있는 ‘나’라는 우상, 열심히 내 영광을 추구하고 만족과 안락을 누리다가 천국에도 들어가고자 하는 우리 인간들의 욕망, 그것이 죄이다. 천국에서 나와 천국을 위해 존재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 것들은 쓰레기이다. 다만, 사람의 힘으로 그것이 쓰레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실상을 까발려 인생이 추구하는 자기 의를 부순다. 그렇게 박살난 자기 부인의 자리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은혜를 구함이 천국 시민의 삶이다. 어려운 이는 어려운 삶에서, 넉넉한 이는 넉넉한 삶의 자리에서 은혜로 사는 것, 거기에서 진짜 섬김과 제대로 된 성도의 삶이 나온다.
하나님은 욕망의 대표적인 구약 인물로 야곱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이미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전해 들었음에도 야곱은 자기 계휙으로 아버지와 형을 속여 가정을 풍비박산 내었던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것만으로는 얍삽한 인간의 행위나 삶이 제어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야곱은 아내를 얻는 것에서부터 외삼촌에게 임금을 받는 것에까지 지나친 소유지향적 삶을 살았다. 그는 전형적인 탐심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로 바뀌는 사건이 있었다. 얍복강가의 씨름 사건이었다. 사실, 하나님은 평생 그에게 동행하셨었다. 그가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갈 때도 함께 계셨었고 심지어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셨다.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실체를 낱낱이 들추어 내셨다. 그 정점이 얍복 강가에서 평생 자기만 위해 살던 그의 샅바를 잡아 환도 뼈를 쳐 위골을 시킨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도의 삶이 결국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환도 뼈를 맞고 다시 태어난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으니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을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 안에 넣고 그 예수의 환도 뼈를 치셨다. 그리고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당신의 백성들도 살게 하셨다. 이것이 십자가로 이루신 이김이었다. 그 일로 야곱이라는 이전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었듯이 신자의 매일매일 삶이란 그러한 하나님과의 씨름 현장이다. 어느 순간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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