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20: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15~20)
코로나의 역설인가? 재난으로 인간이 움츠러드니 지구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 소생은 한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조만간 전보다 더 심한 재앙들이 잇따를 수 있다고 한다. 멈춰야 했던 많은 공장들이 몇 배나 더 가동될 것이고 억제된 소비 욕망, 보복 여행으로 숨쉬기 어려웠던 재앙 이전, 아니 그보다 더한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달린 일이니 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일상의 중독이 이 재앙이 준 경고를 잊을까 그것이 염려될 뿐이다. 모든 중독들이 그렇듯이 삶의 중독, 욕망의 중독에 내성이 생기면 그것이 중독인지도 모른다. 과시하려 애쓰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들, 그 일그러진 탐욕이 창조세계를 훼손하여 기후위기와 바이러스 재앙을 야기하였다.
존재와 소유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갈5:16-26)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일을 극명히 대비시킨 바울의 말이다. 그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때 나타나는 15가지의 악한 열매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19-21절)을 소개하면서 거룩한 영으로 살면 맺는 9가지 좋은 열매도 소개하였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22절). 사랑으로 시작해서 절제로 끝나는 성령의 열매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절제'의 열매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끝에 나오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큰 판단 오류이다.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절제'가 맨 끝에 있음은 그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는 위험한 흉기이다. 그처럼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문명 또한 위험하다. 절제라는 브레이크가 없는 삶은 자신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예수의 말씀이다. 이 말씀 끝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고 하셨다. 돈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말이다.
아울러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16:13) 고도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 향한 사람 마음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 재물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탐욕을 가장 경계하셨다. 탐욕은 성서가 말하는 가장 큰 죄의 하나였다. 탐욕은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채우려 할수록 오히려 더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그 주머니가 늘 터져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배가 고장 나 표류할 때, 목이 말라도 절대 마시면 안 되는 것이 바닷물이다. 마시면 그 끝이 죽음이다. 존재의 허기를 소유로 채우려는 일이 이와 같다. 존재의 허기를 소유로 채우는 일은 목이 마르다고 계속해서 바닷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룩을 훈련하며
출애급 한 이스라엘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며 불평을 쏟아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그들의 원망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보내어 먹이셨다. 아침에 진 주위에서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만나를 제공하면서 그 만나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명하였고 모세 또한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하였다. 필요만큼만 거두고 비축을 금하신 것이다. 그들이 이 말씀대로 하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날마다 신선한 만나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 광야 경제는 <절제의 경제>이었고 <은혜의 경제>이었다. 파라오 지배를 거부하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은 만나를 축적할 수가 없었다. 일용할 양만 가지고 있어야 했다. 남는 것을 모았다가 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축적이 아닌 그날 하루의 필요를 따라 살아야 했다. 그렇게 매일 비우는 삶으로 그들은 고된 여정을 가볍게 하였다. 혹,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누군가가 긁어모았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짊어져야 했고 또 누군가는 부족하여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만나가 비축 가능한 음식이었다면 은총의 땅으로 가는 광야 길에서도 이집트에서처럼,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 사이의 갑을관계가 여전했으리라.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절제의 경제로 파라오의 노예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은 것이다.
여러 해를 거치는 오늘의 코로나 재앙이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망각될까 두렵다. 전염병보다 그것과 싸우고 인내해 온 기왕의 시간들이 가치 없이 사라질까 그것이 더 두렵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감당해 온 어려움에는 필시 의미가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재앙을 불러왔던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단순히 복귀할 수는 없다. 애급 땅의 고기 가마 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의 땅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 광야길에 들어서 있다. 되돌아갈 수 없다. 이 험한 길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단 하나, 은혜의 땅으로 가야 하기 위함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딘다. 지난한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라 생명 시냇가로 가는 연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절제, 그 아름다움으로
출애굽 여정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을 욕망하면 실패함을 교훈한다. 오늘의 소비문화는 정말 그 힘이 강력하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당시 그런 문화의 과시였었다.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도 그 피라미드를 보며 생활하였었으니 어려움이 닥치면 노예였을지언정 그 이집트에서의 생활, 가마솥의 고기를 소비하며 살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화려하고 거대한 과시적 삶은 지금도 우리들을 유혹한다. 더 많이 쓰고 더 비싼 것을 소비하면 더 나은 인간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더 많고, 더 비싸게, 그리고 더 화려한 것을 소요케 하려는 욕망은 늘 비교급이다. 그러기에 결코 만족될 수가 없고 그칠 수도 없다. 안식과 평화는 이 땅에서의 무한 소유에 있지 않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로 기도하라 하셨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고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이며 무한한'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이었다. 무차별적 욕망을 쏟아내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니라 간결하게 진실이 담긴 기도를 하라 하셨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며 없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감사하는 것이 진짜 기도이다. 오늘의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부추기고 더 가져야 한다고 광고한다. 피라미드 같은 상상의 굶주림에 지배되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여전히 파라오의 노예들일지도 모른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수전절을 배경으로 예수가 하신 말이다. 수전절은 주전 164년에 일어난 '성전 정화사건'을 기념하여 드리는 유대인 절기이다. 그 4년 전에 헬라 문화와 종교를 추진했던 황제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감행했었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이 저항운동을 하여 마침내 4년후 '마카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여 다시 하나님께 봉헌했다. 수전절은 이를 기념하는 역사적인 절기였다. 예수의 '풍성한 생명'은 이 성전의 회복과 정화를 배경으로 한 표현이었으니 탐욕으로 더러워진 우리 내면도 정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은총이 '풍성한 생명'이다.
결론
'풍성한'의 원어는 '남김이 없는, 불필요한 잉여가 없는'이란 뜻이다. 탐욕으로 인한 축적과 과잉이 없는 것, 즉 만나와 같이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넉넉한 삶이 진정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버리고 포기하며 비워야 한다. 비워야 은혜의 생명으로 채워진다. 하늘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는 이제 성령의 '절제'의 열매로 이 광야를 지나 저 약속의 땅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구한즉 메추라기를 주시고 하늘의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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