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6. 13:1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8:2~6)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도 아니다. 동물처럼 본능으로만 사는 존재도 아니고 신처럼 완벽한 존재도 아니기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왔다. 세상의 기원이 언제부터이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질문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오래되도 누적된 물음이었다. 그 집요하고 오래된 물음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인간은 나름의 해결책을 제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답으로 나온 것들이 종교였고 이념이었으며 사상이었다.
인간의 문제들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인간의 문제를 예의 결여로 보았다. 왕과 신하 사이의 예의 결핍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부자간, 형제간, 사제간, 이웃 간의 예의 결핍으로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의를 회복함이 인간사 문제에서 해방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삼강오륜>에 입각해서 대인관계를 가지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정말 인간 문제가 예의 문제일까? 한반도에서 이 유교가 국교처럼 되었던 조선왕조 500년은 많은 내분을 겪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었던 중국 왕조도 당파 싸움과 쿠데타로 점철된 나라였다. 예의만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싯달타는 인간이 당면하는 고통의 문제를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인간사에 나타나는 고통과 행복, 선과 악같은 것들은 우주 중심에 존재하는 브라만의 투영이라 해석한 것이다. 정작 그 브라만 안에는 아무 개념이 없는데 그것이 인간사에 투영되면서 인간 자신들이 각자의 관전에서 고통과 행복, 선과 악으로 느끼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감정들이 다 허상이라고 여겼다. 인간 문제의 해법은 그런 가짜 느낌에 속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들이 허상임을 깨닫고 브라만 안으로 <몰아일체>, 또는 <무념무상>함이 곧 구원이라 한다. 정말 인간의 문제가 깨달음에 의해 해결되는 것일까? 더러움과 고통이 모두 허상이라 여기면 인간은 구원을 받는 것일가?
그런가 하면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초월 영역이나 초월적 존재를 인정치 않는다. 모든 것의 근본은 물질이라고 본다. 그 물질과 역사는 발전하고 진화하여 유토피아가 이루어진다고 희망한다. 이런 신념의 사람들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인사에 개입해 돕다거나 전체 역사를 운행한다는 믿음을 비웃는다.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요 맹신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문맹과 발전하지 못함에서 비릇된 것이니 더 교육하고 훈련시키며 노력하면 해결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문제들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자연주의의 정점에 있는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이다.
공평한 세상은 가능한가
칼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엘 바흐의 유물론의 영향을 받았다.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이론도 언젠가 그에 대한 반대 이론이 나오니 그 양쪽을 적절히 수용하는 합이 도출된다고 보는 역사해석 방식이다.. 어떠한 시대정신도 오랫동안 존재하다 보면 반드시 그에 반하는 시대정신이 나오게 되어 그 두 시대정신의 장점을 모두 품은 새 시대정신으로의 발전, 이것의 반복이 역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포엘 바흐의 유물론>은 어떤가?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먹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타락한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가 자기 먹을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바흐였기에 종교에 대해서도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정의하였다. 심지어 종교를 민중의 악이고 아편으로 본 그에게 초월적 영역이나 존재자에게 나약하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어리석게 보였다.
칼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바흐의 유물론을 종합하여 새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공산주의>를 창시하였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경제와 계급의 정반합에 의해 원시공산사회원시 공산사회, 고대노예사회고대 노예 사회, 중세봉건사회중세 봉건사회, 근대민주사회, 공산사회라는 발전 5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원시 시대에는 계급도 없고 경제적 불균형도 없는 공산사회였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가 되는 사회였다. 그러다가 직업이 분화가 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다스리고 착취하는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계급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계급이 생기게 되면 하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게 되고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면 혁명이 일어나 그들이 지배 계급이 되고 또 다른 계급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는 계급의 정반합, 이것이 역사의 발전 과정이다.'
칼 맑스의 자본주의 평가는 정확하였다. 오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차 그렇게 가고 있다. 상위 1% 계급을 위해 나머지 99%가 죽을힘을 다하여 일하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굶는 자식들을 위해 빵을 훔친 가장이 감옥으로 가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수천수백 만 원짜리 명품들이 매진이 되는 현상이 오늘의 실상이다. 이 악순환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맑스는 그 해법을 혁명으로 제사하였다. 노동자 숫자가 더 많기에 혁명에 성공하면 모든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어 세상은 다툼과 경쟁이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그렇게 인간의 문제를 가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계급의 갈등으로 보았다. 그것만 없어지면 인간의 문제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 대로라면 공산주의도 하나의 구원 방법일 수 있다. 구원자 예수도 필요 없다. 돈을 충분히 주고 공평한 사회만 만들어 주면 구원인 것이다.
죄된 한계의 인간
당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맑스는 예리하고 정확하였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자기를 죽여 남을 위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계급투쟁으로 옛 계급을 몰아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위 계급이 나타난다. 인간의 문제는 돈과 계급의 갈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이 정말 행복할까? 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자들이 있고 그들 사는 환경도 좋다. 그런데 그들 자녀 중에도 자살하는 이들이 있고 마약 사범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이들도 있다. 오죽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프로포풀을 상습적으로 맞겠는까? 물질이나 명예가 채워진다 해서 인간은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이 나라 대 대통령들을 보라. 힘을 추구하는 삶의 최정점에 섰던 그 대통령들이 퇴임 후 혹 돌 맞아 죽을까 경호원들 데리고 다닌다. 인간이 돈 많고 좋은 환경에 산다고 반드시 행복해지지 않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신앙으로 살기에 교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어떠한가? 이 땅을 사는 나의 문제, 우리들의 고민은 해결되었는가? 왜 천국에 가고 싶은가? 멋진 집과 환상적인 환경이 제공될 곳이기에?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빈약한 소망이다. 그런 바람은 자연주의자나 물질주의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좋은 차, 넓은 집, 갖고 싶었던 것을 가져본 경험들이 있다.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오래가던가? 물질과 재화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천국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라면 거기서도 우리는 이내 싫증 날 것이다. 싫증 나는 곳은 영원할 수가 없다. 천국은 내가 원하는 환경이 제공되고 곳이 아니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으로 채워지는 그런 곳이 아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인간은 육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육적인 양식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양식도 먹어야 한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진다. 그런데 그 양식의 공급로가 죄로 인해 막혀 버렸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뚫려야 한다. 뚫려서 그 관계가 회복됨을 구원이라 한다. 구원, 그것이 인간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인간은 예의 회복을 목표로 사는 존재가 아니요 모든 고통이 허상임을 깨달고자 목표로 사는 존재도 아니며 풍족한 물질을 목표로 사는 존재들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사는 존재들인가? 하나님과 화해한 존재, 영원히 그 분과 함께, 그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사는 존재들이다. 힘을 추구하고 물질을 목적으로 사는 한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은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이념 시대정신과 가치관이 힘과 권력과 자기 자랑을 좇아 사는 것이라면 신자는 그와 정반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결론
그럼에도 교회에서 신앙생활마저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한다면? 남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신앙생활을 한다면? 자연주의자들이나 성공주의자, 물질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다를 바 무엇인가?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으면 경건조차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삶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생길 뿐이다. 자기의 거룩조차도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 그것이 죄라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는 오늘이다. "주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이니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벧후3:10-13) 세상 사람들처럼 힘을 좇고 명예 권력을 내 만족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함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삶에 진짜 평화와 안식이 있음을 경험하며 세상에 보여주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당신은 믿음의 말씀과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치우고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육체의 운동이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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