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그늘에서

2021. 12. 1. 01:4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신8:1-4)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은 그 성공을 자기 능력과 수고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능력‘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런 능력이 정말 자신의 것인가? 신체적 우월함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DNA이고 당대 사회가 원하는 시류에 맞아 들었기 때문에 스타가 되고 유명인이 된 것이다. 이는 우수한 두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열심도 있었겠지만 그 뒤에는 환경의 세습이 있었다. 그럼에도 성공한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100%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다. 이런 능력주의 사회는 패배자 마인드를 만든다. 승리자의 오만함이 사람 차별을 만들고 기회를 얻지 못한 패배자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성공을 자신의 빼어난 능력 덕분이라 여기며 실패한 이들을 우습게 여기니 모두가 불행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광야를 잊고 사는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는 그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 땅에 들어가 안정되면 광야 40년 동안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 해질까를 염려하여 호소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2-4) 사실, 40년의 광야생활이 고달팠고 고단했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의복이 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면 그들이 광야의 교훈을 잊을까 하여 모세는 거듭 경계하여 말했다. "그러나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7-14)

 

이렇게 말하고도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던지 더 강한 어조로 경고를 하였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8:18-19)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우쭐댐과 교만함이다. "내가 악한 세상을 벌하고 악인들의 악을 벌하리라. 잘난 체하는 자들의 자랑을 꺾고 우쭐거리는 폭군들을 끌어 내리리라"(사13:11) "지금 우쭐대고 자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바울도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당신들은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하나니 설령 우쭐댈지라도, 당신들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당신들을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오"(롬11:18) 라고 경고하였다.

 

제 잘난 맛에 살다 보니

종종 인간은 자기만 존귀하고 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의 은혜, 부모의 사랑, 세상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관계 의존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모태에 짓기 전에 나를 알았고 내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셨다.(렘1:5) 여기 ''라는 존재 뿌리가 하나님의 섭리였고 어머니 탯줄의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익숙해지니 고마움을 모른다. 사랑과 은혜와 보석이 그렇듯이 호의가 반복되다 보니 권리로 착각해 버린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햇빛과 바람과 비와 나무들 때문에 내가 숨을 쉬고 있다.있다.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로 내 소중한 일상을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인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자기 능력과 노력 때문이라고 착각하여 자기도취에 빠져 산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의인과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죄인들이 그들이다. 은혜에 빚진 자임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혼자 잘 났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오만과 교만은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이만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반면겸손은 내 것이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함에서 나온다. '나의 수고와 노력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다'는 깨달음이 있는 삶에서 이런 자세가 나오는 것이다. 스스로를 높게 여기면 남들이 끌어내리지만 스스로를 낮게 여기면 남들이 위로 밀어 올려준다. 신앙에서 교만은 불신앙으로 정의된다. 교만 그 자체가 이미 죄라는 말이다. 인간의 원죄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에 손을 뻗은 것에서 시작되었다(창3:7). 교만은 인간을 신과 이웃과 만물과의 관계 안에 사는 존재임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기중심적 존재로 살게 한다. 다른 생명을 희생하며 자기를 높인다. 오늘의 역병과 기후 재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 자기 스스로 높인 교만의 결과이다.

 

겸손의 공존으로

이런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다. 겸손은 '만나를 주신 신의 은혜를 기억함'이다. 압제에서 해방된 광야 40년을 돌보신 신의 은혜를 기억함이 겸손한 삶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하였다. 이런 고백,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다. 나의 수고와 노력보다 무언가 더 큰 것이 있었음을 깨닫는 삶, 그것이 천국 시민의 삶이다. 성경 어디에도 능력주의나 공로 사상은 없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롬5:17) 생명과 구원에 이르렀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이니 공로에 근거함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니다.(롬11:6,) 공중의 새도 친히 기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귀하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오만과 경멸로 척박해져 가는 오늘의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저 사람의 곤궁은 나의 결핍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복이 곧 저 사람의 행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혼자 내 능력으로 성공해서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신의 자녀가 사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라. 어느 것 하나 자기 힘으로 혼자 자랐다고 우쭐되는 피조물들이 없다. 오직 인간만 예외로 제 잘남을 나대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다. 내가 숨 쉬고 살 수 있음은 수만 년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지탱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창조세계에 빚을 지고 산다. 이름 모를 이들의 수고들에도 빚을 지고 산다. 오늘의 세상 위기에 이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은 단지 도덕이 아니요 신앙이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만나를 주신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는 겸손은 내 살아가는 자리에서 다른 이들, 다른 생명과 공존하는 영적 삶인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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