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 그리고 감사와 생명

2021. 12. 5. 16:3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창49:1~2)

 

한때 잘 나가던 대중스타가 집에서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부모 형제가 살아 있었고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며 고가 자동차에다가 늘 하인처럼 일보는 매니저들도 있었던 그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공항에 내리면 수천 명의 팬들이 운집하였고 많은 콘서트와 드라마 출연 일정으로 바빴던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선택을 하였을? 뒷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가 느꼈던 그의 현실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의 현실이 그의 이상에 너무도 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아등바등 살아왔으나 그 로망을 채우지 못하니 차라리 죽기를 단행하였다 한다.  

되고 싶은 나

끊이지 않는 유명인들의 자살은 대부분 현실과 로망의 괴리, 그리고 그에 따른 불안감이 원인이다. ‘되고 싶은 나가 있는데 그 되고 싶은 나의 자리에 올라가면 또 다른 되고 싶은 나가 나타나니 다시 그 되고 싶은 나를 향한 달음박질을 하다가 버거워지면 그만 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게 금융위기 당시, 어떤 자산가는 자기 주식평가액이 너무 떨어져 100억까지 내려가자 ‘남은 재산이 100억밖에 없으니 난 망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도 만져 볼 수 없는 거액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그 역시 자기가 원하는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실의 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미래의 되고 싶은 나라는 그림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사이의 갭 채움을 인생 목적으로 산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채우려 하는 모든 시도를 탐심이라 한다. 내일 일은 내일에게 염려하게 하라’고 예수가 말씀하셨음에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채우려는 탐심이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은 현실의 불안과 과거 에 대한 불만족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세상 인간들은 탐심 속에서 태어나 탐심을 부리다 탐심에 의해 죽는 셈이다. 즉, 탐심은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는 첫 사람 아담 이레 모든 인간들이 가진 죄성의 다른 표현이다. 애당초,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에게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담들이 라는 우상과 내 자랑을 위해 끝없는 탐심을 부리며 사니 비극이다.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탐심의 자리는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이다. 그러니 어떤 것이 그 자리에 들어선들 그 탐심이 채워지겠으며 만족할 수 있겠는가?그렇게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 원하는 대로 살려하는 삶에 하나님은 진노하심을 바울은 지적하였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3) 우리 인간들이 합의한 가치와 이김이 승리라는 아담적 사고, 그 사유에서 마음이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있는 모든 것이 탐심의 상태요 그러한 존재 자체가 이미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 원하는 바

여기 원하다는 원어 ‘에피뒤미아’를 롬7:7에도 본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과거 바울은 탐심이 죄임을 몰랐다.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 그 율법 내용이 모두 인간의 탐심에 관한 경고임을 깨달았다. ‘탐심이란 단어를 에베소서 표현으로 바꾸면 마음의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른 채 인간이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이 다 탐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용어가 예수의 말씀에도 등장한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28:15)  원하고 원하였다는 단어가 ‘에피뒤미아’이다. 같은 단어가 하나님의 뜻에 쓰이면 선하고 인간에게 쓰일 때에는 탐심, 즉 죄로 둔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였다. 이로서 탐심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그 우상, 즉 자기를 위한 모든 생각과 행위들이 바로 탐심인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이 맡긴 역할을 벗어나 인간적 착함과 업적으로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얻는 것도 탐심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만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계획으로 자기만족과 인기를 챙기는 일체의 행위와 시도들까지 탐심인 것이다. 창 49장의 야곱 유언을 보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인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내려지는 예언이 다 달랐다. 잘 알려진 대로,그들 열두 지파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유다는 다른 형제들의 왕으로 예언이 되는 반면, 레위나 시므온 같은 이들은 유다의 잉여를 무상으로 받아서 사는 역할로 예언되었다. 야곱의 예언은 뒷날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서로 가서 말 그대로 구현되었다. 유다는 죽도록 싸워서 시므온에게 기업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시므온은 면목 없는 모양새로 유다가 주는 잉여를 받아먹기만 하였다. 그러나 공여자 유다나 받는 자 시므온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도적과 윤리, 양심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의 뜻을 각자의 역할에서 은혜로 사는 존재들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옆의 강도 역할이 맡겨지면 그 역할에 충실하다가 가면 되는 것이고 바울과 같은 역할이 주어지면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 된 삶이다. 그러니 우리 착한 행실의 많고 적음이 그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나를 안다는 것

이런 어투의 말들이나 문장에 확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왜 내가 신의 뜻만 드러내는 수동적 삶을 살아야 하나?’ 이런 분냄은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적 근성이다. 내가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를 보이고 싶음이 그 발로인 것이다그렇다면 장사하여 이윤을 보려 하는 모든 시도를 중단해야 하나? 자본사회에서 불가능하다. 야고보는 이 권고 속에 생명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다. 장사하여 이윤 챙기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이해 없이 되고 싶은 나만을 위한 장사는 허탄한 자랑이며 악하다는 말이다. 선이란 착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은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야망과 비전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허락한 지금에 순응함이 선이고 경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들이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면서 미래의 되고 싶은 를 향해 계획하고 달리는 죄로 산다. 설령, 그것이 정당하고 옳게 보이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아니면 모두 악임에도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착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은 착했고 종교적으로도 철저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이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니 예수가 그들을 의롭다 인정하셨다. 이것이 인간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이 같은 그림에는 인간의 망함과 예수의 흥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저는 죽은 흙에 불과하고 주님은 저를 빚으시는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와야 할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존재는 그런 고백에서 만들어져 간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생명을 가진 존재는 없다. 목숨이 붙어 있다 해서 다 생명이 아니다. 생명은 예수 안에 있다. 내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라는 생명을 받아야 산 자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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