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1. 01:1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민3:11~13)
레위인들은 경건의 특권을 부여 받았던 신분층이었따, 이후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문 종교인, 지식인들의 자리를 누린다. 예수 당시까지도 그랬다. 복음서에는 예수 추종층과 반대층이 확연히 구분된다. 대체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서민계층이었고 반대하던 사람들은 지식인과 엘리트,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이상한 것은 누구보다 더 메시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종교전문가, 지식인들이 오히려 그 메시아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법과 전통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제사장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물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며 또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 시비의 요지는 여기서 설교할 자격증을 어디서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나 성전에서 설교한다면 대중들을 오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는 “내가 내 입 갖고 말할 자유도 없나?” 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었지만 점잖게 답하였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위를 받아 세례를 베풀었는지 대답해보시오. 그 대답을 듣고 나도 당신들의 질문에 대답하겠소.”
의외의 반문에 제사장들과 원로들은 당황했다.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 하면 그를 믿지 않는 자신들의 태도가 문제요 그의 권위를 무시하면 여전히 그를 예언자로 믿고 따르는 대중들에게 공격당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궁색해진 그들의 궁핍한 대답이었다.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말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이에 예수도 말했다. “그러면 나도 대답하지 않겠오” 예수와 엘리트들 사이의 말장난같은 이 논쟁 핵심은 권위 문제였다. 기득권적 엘리트들이 생각하는 권위는 법과 전통이었다. 그것이 허락되면 진리이고 허락되지 않으면 거짓인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법과 전통, 그것은 문명을 일으킨 인간의 아름다운 업적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문명국마다 법과 전통을 수호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련되었다 한들 법과 전통은 상대적 가치이다. 국법이나 교회 제도조차도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계속 개혁되어야 하고 절대적인 것이 오면 폐기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 법이나 어떤 장소의 전통도 한계를 노출되면 변화하고 개혁되어야 공동체의 효율성이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유대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법과 전통을 상대화할 용기가 없었기에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두 아들 비유
자신들의 낡음과 오류가 들춰지면 기득권층 엘리트들은 은폐를 위한 합리적 논리를 찾으려 한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라는 힐문은 그들이 기댈 언덕이 진리가 아니라 법과 전통이라는 권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질문을 비껴간 예수는 대신에 한 비유로 그들 실체를 폭로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맏이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는데 맏이는 처음에는 싫다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같은 말을 둘째에게도 했는데 그는 가겠다 대답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다. 예수는 이 비유후 엘리트들에게 물었다. “이 둘 중에 아버지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겠오?” 당연히 그들은 맏이라고 대답했다. 뻔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 해석은 뜻밖이었다. “분명히 말하건데 여기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오.” 어처구니 없어하는 그들에게 예수는 더하여 말했다. "요한의 가르침을 당신들은 믿지 않았지만 이들은 믿었기 때문이오." 황당해 하는 그들의 태도에 예수는 확인하듯 말했다. “당신들은 그것을 보고도 끝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그를 믿지도 않았오.” 사실, 이 비유는 상식적이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원로들은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세리와 창녀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에 그런 세리와 창녀가 먼저 들어간다는 말은 비논리적이었다. 엘리트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말과 행동에 분노하였다. 종교학자 라즈니쉬는 부처와 예수를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은 고상하기 때문에 서민이든 귀족이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만 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적들을 만들어 냈다> 일리 있는 분석이다. 형편없이 산 자들이 품위 지키며 고상하게 살아온 자기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일 뿐
제사장들과 원로들은 무슨 문제가 있어 예수의 말에 공감치 못했던가?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무슨 이유에서 예수의 말을 진리를 인식할 수 있었을까?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니? 이 비유의 진의는 깊다. 엘리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천한 사람들은 받아들였음에 그 열쇠가 있다. 인간에 대한 심층 이해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모르면 이 열쇠를 열 수 없다. 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기에 고상한 지도자들보다 세상 막장들이 그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가?
비밀은 자기 비움이다. 인간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그 외의 것들은 의미가 없다. 자기 업적, 모든 행위,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포함한 어떤 공로도 의미가 없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할 수 있다. 세리와 창녀 같이 막장으로살았어도 그 그런 삶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 자기 비움. 비우는 그 순간부터 그 인생, 그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정말 그렇게 살아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다.
실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성취할 때 기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늘 한정적이다. 기쁨은 잠시일뿐, 조만간 더 나은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빠진다.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평생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매달려 왔고 그 결과에 뒤숭숭하게 사는게 우리 인생이다. 그래서 정신치료를 받기도 하고 요가나 단전호흡을 하면서 내면의 평정을 훈련하기도 한다. 이런 훈련들이 효과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치료일 뿐이다. 진짜 기쁨과 평화는 이런 것들로 가능한 세계가 아님을 일찍부터 성경은 말해왔다.
결론
솔직히 세리와 창녀들은 사람들에게 내세울 게 없었다. 누가 비우라 말라 하기 전에 이미 망가진 삶이었으니 비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예수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는 종교전문가, 지식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울 자기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교만하거나 못된 지도자들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의 고상한 종교 행위를 통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세련된 예배와 기도, 성경읽기, 봉사, 이런 것들도 나름 가치있다. 그러나 그런 경건도 그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면 그 신앙적 삶은 실패이다. 경건주의의 함정인 것이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메시야를 눈 앞에서 보고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업적, 꿈, 야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영이 우리 삶을 지배해 간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한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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