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 00:2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12:1-4)
우리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견해가 같은 사람들과만 소통한 것이다. SNS 발달로 이 현상은 더 심해졌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면 불안을 느끼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서 자기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말하는 사람에게만 귀를 열였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잘 뭉친다. 성향이 비슷하니 예측하기 쉽고 협력하기 쉬우며 인간관계에 치르는 비용도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기만 할까? 소통의 역작용, 확증편향이나 그로 인한 오류는 없을까?
익숙함과 낯섦
"진리를 알라.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의 이 말에 적대자들은 항변하였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자기들이 만든 편견과 프레임에 노예가 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그들은 신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과 전통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사는 자기들은 의롭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틀렸다고 단죄해 왔었다. 이런 것을 '변화맹'이라 한다. 자기 관심 영역 밖의 상황이나 사물 변화에 무감한 현상이다. 본래 인간이 그렇다. 아는 만큼 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만큼만 본다. 피조물 중 가장 영리한 존재라 자부하는 인간의 뇌는 이렇듯 잘 속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같은 시공간에 있어도, 인간의 뇌는 각기 다르게 코딩된 정보를 접수하고 저장한다.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는 셈이다. 뇌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님에도 우리는 그 뇌에 속는다.
아브람이 고향 땅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막상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받아 그 이름이 창대케 되어 그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성취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기 전, 마지막 고별사를 하시며 불안과 염려에 잠긴 그들을 위로하여 말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함이로라" 성경 역사는 생명과 언약을 향해 익숙함과 평안함에서 용감하게 떠나는 사람들의 믿음의 기록이다. 자기자기 틀 밖에서 신의 구원과 창조와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닫혀버린 세상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하고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휴먼 네트워크가 닫혀갔다. 급기야 공감력까지 사라져 갔다. 어느사이,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는 메커니즘이 준동되더니 어떤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꼬리표를 붙이며 혐오하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공동체 안에서 '이래도 괜찮은지'에 대한 성찰과 반문의 능력도 희석되어 갔다. 보고 느낀 그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되묻지 않았다. 기사나 칼럼에서 어떤 사람을 읽고 '사람 나쁜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 때 '왜 그랬을까?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까? 나의 어떤 경험들이 이 사안을 이렇게 보게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자기 생각과 관점에만 몰두하여 옆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렇게 자기 세계 안에 갇혀 버린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할 능력도 없다. 신앙조차도 그저 자기의 내적 소망과 감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자폐성 장애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라사의 광인' 이야기를 아는가?(눅8:26-39).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 이르렀을 때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옷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한 채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였다. 쇠사슬에 매여 있었으나 몹시 사나워 누구도 그가 있는 무덤 사잇길로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알몸에다가 시도 때도 없이 질러대는 괴성의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그 광인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희망을 잃고 점차 죽음으로 기우는 우리들, 겉모습은 말끔하나 속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우리들, 온갖 것에 묶여 있고 통제받는 나를 알아달라고 소리 지르지만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우리들이다. 오늘의 사람들은 밖에서 입는 상처뿐 아니라 스스로 입힌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그런 나를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래서 혼자만의 방에 갇혀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광인에게서 본다.
회복을 향하여
한 사람의 생을 이렇듯 철저하게 무너뜨린 악한 귀신을 예수는 내몰고 그 인생을 회복시키셨다. 그리고는 그를 사회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셨다.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 자유가 필요하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스스로가 만든 편견과 무지의 틀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해방이 필요하다. 존귀한 신의 형상으로서 거짓 진리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진리 안에 살아야 한다. 이제 '필그림'의 삶이 필요하다. 인생은 순례라 하였다. '순례'라는 용어 '필그림'의 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이다. 순례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고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며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걷는 것이다.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걷되 하늘 별을 보고 믿음으로 걷는 삶이다. 그런 사람이 변화에 열린 사람이고 '프레임 바깥'을 볼 수 있다. 매 순간 디아스포라가 되려는 삶, 주류로 편해지려는 자신을 경계하여 불편을 마다하지 않는 삶, 안도감으로 느슨해지는 순간 스스로를 부정해 다시 깨달으려는 삶, 이런 삶이 영원을 지향하는 자유인의 삶이다.
하나님은 '나그네의 하나님'이다. 인간의 생각 그 너머에 계시고 우리의 프레임 바깥에 계신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옛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새 일을 꾸미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매일매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하셨다. 그가 새 일을 행할 터, 이제 나타낼 것이거늘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고 물으신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순례적 삶을 사는 사람, 자기 틀 밖으로 탈주하는 사람이다. 길들여진 습관의 익숙함, 과거의 업적에 도취하고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 하며 미래를 불안으로 사는 삶을 버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자신을 열자.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장차 올 그것을 사모하며 사는 이들이 있다. 이곳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다. 통념을 벗어나면 살던 세계가 낯설다. 그러나 경이로움을 경험케 될 것이니 이 어찌 은혜라 아니하랴!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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