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 12: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6-15)
이천 년전. 당시에는 이 복음이 이천 년 후 극동의 한반도까지 전파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의 제자들에게서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유난히 배타적이었던 유대교와 강력한 제국 로마, 그 사이에서 복음이 생존하여 전파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어떤 힘에 이끌렸던 제자들이 한순간 열정적으로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다. 남은 인생을 걸고 자기들 목숨까지 던져 전도한 역사의 결과가 오늘의 기독교이다. 그 대표적 헌신 인물 중 하나가 바울이었다. 그는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 선교사역을 한 바 있었다. 그 와중에 선교단 일행 사이에 적잖은 문제들도 있었다.
바나바와 함께 1차 사역을 마치고 다시 선교를 떠나려고 할 때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마가에 대한 처리 때문이었다. 바나바는 마가의 동행을 주장하였고 바울은 반대하였는데 이 문제로 두 사람은 결별하였다. 바나바는 마가를,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이 2차 선교사역에서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바나바와의 갈등에서 비릇된 어려움은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행16:6).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뭔가 일이 꼬였음을 성령이, 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사역이 방해를 받으면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바울의 건강 때문? 바울은 병약했고 지병도 있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가 수행했을 정도였다.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하였다. 알바로 돈을 벌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 보면 경제적인 문제로 사역이 중단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유대교나 로마 당국의 박해나 내부 알력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충돌은 큰 문제였다. 이 양대 기독교는 오늘의 가톨릭과 개신교 갈등의 양상과 유사하였다. 양쪽 모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지만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 전통을 주장하였고 이방 기독교는 그것을 거부했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해소되지 않고 더 심화되었다. 일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바울은 갈1장에서 유대 기독교 주장을 ‘다른 복음’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격하게 말했다. 빌3장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육체를 신뢰하는 개와 같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런 거친 발언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곳마다 유대 기독교가 대표를 보내 바울이 전한 복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같은 기독교 세력끼리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바울의 인간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도 하였다. 볼품없이 생겼다느니, 말을 잘할 줄 모른다느니, 사도권이 없다는 등 신학적인 문제를 넘어 감정적인 문제까지 자극하였다. 그 사이에서 이방 기독교인들의 마음까지 흔들렸으니 바울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어떤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운다. 자신이 먼저 복음을 뿌린 지역이니 그 기득권을 내세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다. 자기 신학적 소신을 굽히거나 일부의 영역에서만 말씀을 전하도록 피차 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였다. 자기 소신을 굽히지도 않았고 그 자리를 고집하여 이전투구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신학적으로 옳았지만 더는 다투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이미 유대 기독교가 지배하는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고자 결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환상 이야기가 소개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마게도냐로
마게도냐는 고대 그리스의 북쪽 지역이다. 바울 일행이 갈라디아와 소아시아를 포함한 지중해 동편 지역을 포기하고 바다 건너 마게도냐로 선교지를 변경함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가 포기하기로 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자기 인생을 쏟아 헌신하면서 순전한 복음으로 세운 교회들이었다. 그런 지역을 포기함은 그 지역 신자들을 모두 유대 기독교의 세력권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소아시아의 상당수 신도들은 바울 일행을 계속 붙들어두고 싶어 하였다. 오히려 떠난다는 바울 일행에게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 그들의 결정이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일단 마게도냐로 사역지를 옮기겠다고 결정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드로아를 거쳐서 다음날 네압볼리에 닿았다. 네압볼리는 빌립보로 가는 길목의 항구도시였다. 그들은 거기서 육로로 당시 유명한 도시 빌립보에 들어갔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고 로마의 직할 식민지였던 이곳에서 첫 여성 세례 신자가 배출되었다.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하였고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그녀와 빌립보 교회는 꾸준하게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훗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빌립보서이다. 빌립보 교회 설립은 세계 기독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유럽의 첫 교회였고 그 빌립보 교회 설립으로 여타 유럽 지역에 복음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교지를 마게도냐로 변경하게 된 계기는 환상이었다. 밤에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이 '환상'은 헬라어로 '호라마', 스데반의 순교 설교인 행7:31절에도 나오는 단어이다. 스데반은 모세가 본 시내산 가시나무 떨기 불꽃 현상을 '호라마'라는 헬라어로 설명하였다. 모세가 본 불붙은 가시떨기 불꽃은 ‘엘모의 불’이라는 자연현상이었다. 일종의 정전기와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호라마'는 초자연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모세는 그 현상에서 거룩을 경험하였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현상이 어느 순간에 신적 경험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바울에게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은 신적 빛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사역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고 방향을 튼 것은 신의 환상을 보고 사는 이들의 삶이고 용기였다.
준비된 삶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환상을 볼 수 있을까? 준비된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 준비는 성령과의 공명이다. 성령과 공명된 이들은 이 세상에서 신적인 빛을 볼 수 있다. 깨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그 모든 것들이 성령과 관계되어 있다. 이런 용어, 표현들이 다분히 종교적이어서 돈과 성공 같은 세속 삶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낯설고 고루할 이야기 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길들여진 자기 것이 정말 현실이고 실체라며 착각하여 살고 있다. 이것을 설명한다 한들 과연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될까? 이미 한 가지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어렵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이 있다고 아무리 설명한들 이해에 인색할 뿐이다. 색안경을 벗어야만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다.
성령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실체가 없는 하나님이요 영이다. 다만, 그것은 바람과 같아서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 그 힘조차도 한 가지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도 않는다. 방언, 신유 같은 능력들은 많은 현상 중의 일부일 뿐이다. 굳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그런 현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신앙 건강에도 좋다. 앞에서도 말한 바, 바울은 갈라디아와 소아시아에서 더 이상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이는 바로 성령이었다. 그 성령은 예수의 영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정작 성령이 무엇인지, 그 성령과의 공명을 원한다면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라는 한 인격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성령의 일이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이 본질상 동일하다고 선포하였다. 예수는 알지만 성령 경험은 없다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성령의 공명을 받으면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되면 성경에서 ‘죄’라고 정의한 자기 집착,,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난다. 벗어나면 그때부터의 세상은 새롭다. 사물과 사건의 새 시각이 열리는 것이다. 종말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환상을 본다. 이천 년 기독교사의 우리들 신앙은 그냥 된 게 아니다. 환상을 보고 세상을 빛으로 경험한 선진들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의 우리는 성령과의 공명에 성실한가? 그 성령으로 세상의 빛을 제대로 보고있는가? 훗날, 오늘의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2: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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