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달음질 헛되지 않도록

2021. 11. 12. 11:38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93:1-5)

 

고대인들에게 왕의 제관식은 가장 권위 있는 행사였다. 시인은 '야훼께서 위엄을 옷으로 입으시고 왕위에 오르셨다. 야훼께서 그 위엄 위에 능력을 띠삼아 동이셨다'하였다. 이는 일국의 왕으로 묘사함이 아니었다. 신의 권위를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위엄자 앞에 모든 이들은 자기를 낮추는 법. 그렇듯이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말이다. '위엄''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절대적 권위의 그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세상과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셨으니 세상의 토대는 확실하다. "처음부터 당신은 야훼십니다"라는 명제처럼, 이 세상의 토대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적어도 신자들 이를 사실로 수용하고 신념하여 살기에 신앙인드리아 한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도 이 세상 근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사유체계를 세우곤 했었다. 세상은 무엇인지? 그 토대는 무엇인지 성찰하면서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고대인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했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3천년전 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세상을 보는 직관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앞에는 그 무엇이 있다. 크게는 우주, 작게는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현상과 운동들과 여러 사물들이 있다. 민들레, 사슴, 모기가 있고 안개, 구름, 바람이 있다. 가깝게는 인간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다. 이런 '있는' 것들은 생명과 비생명으로 구분되어왔다. 또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도 구분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있다'고 함은 무엇인가? 나무가 이 지구에 있어야만 하나? 왜 어떤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새롭게 등장하나? 이 순간에도 하루에 수십 종의 종들이 지구에서 사라진다. 왜 그런 것들은 그렇게 잠시 있다가 없어져야 하나? 잠시 동안 이 땅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에게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질문을 하자면 끝이 없다. 질문이 계속될 수밖에 없음은 이에 대한 실증적인 대답이 여전히 없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만 주장할 뿐, 세상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러다보니 두 극단이 나타넜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입장이었다. 가시적인 이 세상보다는 비가시적인 영적 세계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태도가 그 한예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특성이 짙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이용하는 입장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으니 세상을 이용하여 행복을 추구하자는, 오늘의 기술문명이 이런 사고에서 출발했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외면함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고 세상 이용에만 마음을 둔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천박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왕좌이다. 세상이 하나님 자체는 아니나 위엄과 능력으로 토대를 놓으시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세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물결소리 높습니다! 야훼여, 강물소리 술렁댑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합니다."라는 외침조차도 예서롭지 않다. 무엇을 보고 이렇게까지 노래할까? 뒤에는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라는 표현까지 있다. 화산폭발? 홍수? 오늘에도 자연재해는 두려운데 하물며 3천년전 고대인들에게는 오죽했으랴? 이런 두려움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신화 형식을 통해서 자주 등장했는데 창세기의 노아 홍수도 역시 이런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

 

자연재앙만 두려운 게 아니었다. 고대에는 정치권력이 인간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힘을 소유한 자들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거만한 자는 자연재앙만큼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였다. 성경시대는 그런 교만한 왕과 제후들이 자기 패권을 마음껏 휘두러던 세상이었다. 예언자와 시인들에게는 그런 악한 힘들을 명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다. 일종의 역사인식이었다. 성경 또한 인간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건 내 신앙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개인 신앙에만 치우쳐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고 여기는 태도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운동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거룩을 지향하는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아니라 여기는 생각, 모두가 잘못된 자세이다.

 

하기야,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종의 역사 낙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둘로 구분되는데 그 하나가 정치투쟁으로 사회를 민주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앙적 전제가 필요하다. 정의와 평화를 이끄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의 기독교인들은 도덕성으로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도덕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세상 역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종말론적으로만 완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일들이 아무리 멋있고 완벽했다 한들 그저 잠정적일 뿐이다.

 

주인 하나님

분명, 재앙과 권력의 횡포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의 터전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앙, 그 근거는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 분의 보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었다. 높은 데 계신 그 야훼가 더 강하지 않은가!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고 많고 많은 물결소리보다 더 세다. 이게 기도교인 신앙이다. 이 세상의 힘들이 요동친다한들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이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별은 이 우주 가운데서 이 지구뿐이라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으로는 그렇다.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별이 없을뿐더러 설령 있더라도 지구와 같은 환경이 주어지기 어렵다고 한다.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유기물의 생성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생명현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보아도 이 생명현상은 우연과 우연의 결합에 의해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있다. 비록 인간이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구조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모두들 그 사테를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서울시민의 쓰레기를 모았던 난지도가 쓰레기 투입이 끝나 몇 년 후에 생태적으로 되살아났다. 물론 그 과정에 이 사람의 노력, 저 사람의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생명 복원력을 갖고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멸종해도 하나님은 다시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진화의 과정이 전개될 수 있다. 인간들이 망까뜨려도 하나님은 다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역사에도 다르지 않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하는' 이 세상의 권력은 아무리 요동친들, 하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 그리고 그 역사를 허물지 못한다.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 이 세상 역사를 유토피아로 건설할 수 있을까?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세상의 터전을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함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믿기에 작금의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역사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이시다. 그 위엄과 능력은 베들레헴 말구유의 한 아기를 메시아로 일으켜 세우셨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를 다시 살리셨다. 이런 분이 우리 삶을 지켜주시니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 삶이, 신앙의 터전이 흔들리지 않는다. 복음을 사수하며 진리의 삶에 흔들리지 않았던 바울처럼 말이다.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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