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룩한 길에서

2021. 11. 10. 10:1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8~11)

 

신앙의 정도를 살자니 어려움이 많다. 흔히들, 믿으면 믿는 그 신이 도우사 어려움은 사라지고 행복이 내 삶에 올 것이라고 믿으나 이는 착각이다. 아니 위험한 발상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삶의 고난은 당연히 믿는 그 신께서 막아주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우긴다. 실제로 러셀이나 볼테르 같은 사상가들은 인간들이 겪는 전쟁과 기아, 범죄, 질병을 막아주지 않는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며 반기독교를 선언하였다.

 

고난이 싫은 인간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고난을 즐겨 하는 사람도 없으며 시험이 닥쳤을 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더욱 없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변태요 정신 병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 고난, 시험 없는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런 고통 느끼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센병자들이다. 이 병은 통증을 느끼는 신경들이 감염되어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우리 몸은 알게 모르게 통증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눈을 오래 부릅뜨고 있으면 눈이 시려 눈물을 흘리게 되거나 눈을 깜빡이게 된다. 고통이 눈의 시력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은 더 큰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신앙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시험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더 없는 사랑으로 아끼신다. 당신 아들을 우리 목숨 값으로 지불하셨으니 과장하면, 우리를 자기 아들보다 더 사랑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왜 우리 삶에 닥치는 고통과 고난을 막지 않으시는나? 분명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노라 약속을 하셨고 우리 삶에 간섭하시며 지금도 내주하고 계시는 분이 왜 우리가 고통당할 때, 시험 당할 때를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일까? 독실하다는 사람, 누구보다 더 기도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삶에 닥친 고통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떠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왜 하나님은 그 고통들을 방치하고 계실까?

 

멀리서 물어볼 것도 없다. 믿는 우리 삶에 그런 고난이 있었고 그런 어려움들이 산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막아주셨던가? 솔직히 아닐 때가 더 많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 그 고통을 두고 보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이해함이 쉽지는 않다. 얀시는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이 그 이유를 확실하게 다 밝혀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시험 당하고 고난당하며 고통 겪는 이유를 분명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등지고 이제 세상과 원수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한 자들이니 당연히 세상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며 그로 인해 고난이 닥칠 것을 이야기 한다.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6:33)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악에서 오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 그것은 징벌이 아닌 징계로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개념이다. 사실, 하나님은 온통 당신 자녀들의 거룩에만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 거룩한 길에서 우리가 온전치 못할 때 하나님은 가차 없이 징계하여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조명해 주신다. (12:6-8) '나의 자녀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자.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듯이 우리에게 대하신다. 부모가 훈련하지 않는 자녀가 무슨 자녀이겠는가? 모든 자녀가 받는 훈련을 우리가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니다.

 

셋째, 우리를 하나님의 강한 백성으로 연단하시기 위해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신다. 이런 시험은 우리 믿음을 순화시키려는 것이지 결코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벧전1:5-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잠시 동안 여러분이 여러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지더라도 이를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그렇다면 고통과 고난과 시험의 원인은 하나님인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과 고난은 모두 우리 죄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말도 아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가 고난을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이 고난의 조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인간의 죄에서 기인하였다. 질병, 전쟁, 살인, 약탈, 폭행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것은 없다. 나의 죄이든 다른 이의 죄이든 일체 인간의 죄가 인간의 고통을 배태한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그러한 우리 죄의 결과들을 우리의 선을 완성시키는데 이용하실 뿐이다. (1:14-15)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모든 원인은 죄인인 우리에게서 비롯되었다. 우리 욕심이 강도와 살인을 낳고 우리 나태와 식탐이 비만과 성인병을 만드는 것이며 우리 이기심이 불안과 불편함을 만들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드셨냐고 질문할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았다. 진짜 피해자는 하나님이다. 가해자는 타락한 인간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몰아낸 것도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자들도 인간들이었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은 신앙인의 삶에서 필요하다. 고통이 없는 한센병자들이 그로 인해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처럼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죄된 세상이 토해내는 고통의 사건들이 감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죄가 만들어 내는 더러운 배설물들이 반드시 들춰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경험되어진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긍휼의 마음이 있을 수 있을까? 거기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자비가 존재할까? 거기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인내가 필요할까? 서로를 위한 격려나 위로가 필요할까? 삶 속에서 맺어야 하는 친절, 온유, 용기, 순종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아무 고통이 없는, 고난이 없는 세상에서 학습되고 경험될 수 있을까?

 

결론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잊지 말자.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기 위해 사는 것이지 이곳에서의 무사, 행복,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기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분명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이니 내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라고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어야 신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을 언도받고 8개월 만에 그 사형이 집행된다. 사형대에서 마지막 유언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았다. 그 순간 교회 첨탑에 올려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묘한 감정이 그에게 올라왔고 그 순간 황제 특사가 등장하여 그는 사형을 면하고 유배길에 올랐다. 끌려가는 중 그는 죽음 순간 자기 눈에 들어왔던 십자가가 궁금하여 유배지에서 그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그 유배지에서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신앙을 바탕으로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은 걸작을 썼다. 두 작품의 주제는 모두 죄와 인간과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성경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 낸다해도 나는 그의 참말보다 그가 거짓이라고 증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었다.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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