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8. 11:3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12:1~4)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4:35~41)
키엘케골의 저서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은 모든 사람들의 이상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그의 발목을 잡는 유혹일 뿐이었다. 그는 이 유혹을 단호한 결단으로 외면하였다. 윤리적 의무를 지지하는 보편 세계에서 그는 이상한 사람, 외톨이가 되었다. 인간의 이성/도덕가치와 신에 대한 맹목/절대 이행 사이에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키엘케골은 이 두려움과 떨림을 종교적 체험, 또는 은혜의 경험이라 하였다.
그 갈릴리 호수에서
가나안땅 북쪽의 갈릴리 호수, 예수 당시 그 호수는 바다같이 넓었다. 그 갈릴리 호수에서 많은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 날이 저물자 그는 일행들과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였다. 몰려든 인파들을 피해서 휴식을 취하고 싶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찾아가시기도 했지만 때로는 자주 사람들을 피하기도 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배를 준비하여 따라왔다. 호수 서편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를 선두로 몇 척의 배가 노을을 등지고 동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갈릴리 호수에 갑자기 큰 광풍이 불고 파도가 높아졌다. 원래 이 호수는 그런 돌풍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지만 이 날은 정도가 심하여 배가 침수될 지경이 되었다. 그때 예수는 배의 뒷쪽에서 자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도 자고 있었음은 그만큼 피곤하셨던 것이다. 다급한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대부분 이곳 어부 출신들이었다. 이 호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에게 이런 풍랑은 일상적인 경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부답지 않게 급히 흔들어 깨우니 피곤한 잠에서 깨신 예수는 다짜고짜로 바람을 꾸짖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순가,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이것은 실제 이야기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에 냉소적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전지전능한 슈퍼맨으로 여긴 이야기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를 빼버리고 실제 교훈이 되는 가르침만 보자 한다. 이를태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과 해석은 기독교 신앙을 단지 휴머니즘으로 격하할 위험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이야기에서 자연까지 말 한 마디로 제어할 수 있는 예수의 초능력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능력이 바로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명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귀하다. 예수는 바로 신의 아들이요 그 분과 본질적으로 일치되는 존재이니 신의 창조 능력을 그대로 행사하실 수 있다.
믿음의 문제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예수를 생각하면 진짜 믿음을 놓친다. 예수는 신이지만 인간이다. 그가 초자연적 능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분이었다면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복음서 기자들은 왜 초자연적인 능력처럼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 것일까?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사정이 있었다. 복음서를 포함한 모든 신약성경은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에 당시 사정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오늘의 기독교 상황과 완전히 다르다. 오늘에는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었고 특히 유럽과 미주에서는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당시 주변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자신들의 공동체가 언제 해체될지 모른다는 위기속에 살았다. 마치 풍랑을 만난 배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었다.
예수는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음! 그렇다. 분명 믿음의 문제였는데 이 믿음이란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는 믿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메시아로 믿는다? 가당치 않은 소리였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수치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바울이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 게는 미련한 것이라”(고전1:23) 라고 말했으랴? 유대인들의 종교 전통으로도 떳떳하지 못하고 로마의 정치적 전통으로도 어리석은 십자가 처형, 그렇게 죽은 이를 믿으라는 말은 언어도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가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오늘의 우리들은 당시 기독교인들과 달리 예수를 잘 믿고 있으니 걱정이 없을까? 지금도 십자가 사형자를 메시아로 믿는 건 쉽지 않다. 십자가형을 인생 실패로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패를 원치 않는다. 아니, 그런 삶을 저주한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십자가는 예수만 지고 우리는 그분 덕분으로 편히 살고 싶어한다. 그러다보니 성공주의라는 목표에 믿음이 오염되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성공하지 못했을 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설령, 성공했다고 한들 진짜 자유와 평화도 오지 않는다. 인생은 노력한 것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연결되어서 내 앞에 펼쳐진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믿음은 성공과 실패에 있지 않고 신의 구원 사건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게 신앙이다. 거기에서 풍랑같은 세상살이에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믿음으로 풍랑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는 누구인가
그 호수 바다에서 예수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들은 무척 두려웠다. 단순히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예수, 그에게 놀란 것이다. 종종 예수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이 크신 아버지, 따뜻한 친구' 등, 요즘 식으로 말해 인생의 멘토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한 부분이다. 아버지나 친구가 멘토는 되겠지만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인생 상담자일 뿐이다. 갈릴리 호수 바다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면서 ‘그가 누군가’하고 질문함은 예수를 인생 상담자 수준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으로 경험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두려움과 떨림이었다. 교회를 다닌다면,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경험들이 있는 사람들이다. 바람을 꾸짖고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하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진 사태 앞에 그걸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서 서로 저 분이 누군가고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신의 아들로, 신과 하나이신 분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 진짜 생명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 경험은 낯설었으니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우리가 지금 관계하고 있는 것들, 집, 돈, 가족, 친구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에게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간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큰 부자와 그의 재산이 5백년 후에 어떻게 될까? 아무도 세상에서 자기 소유를 완벽하게 주장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시간과 더불어 다 없어진다. 예술도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잠정적일뿐 궁극적이지 못하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무의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성서시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예수에게서 경험했다. 예수를 통해서 풍랑처럼 요동치는 세상살이가 잔잔해지는 걸 경험했다. 이런 경험은 이전에 없었다. 그것은 두려움, 곧 경이의 두려움이었다. 동굴 안에서 횃불만 켜놓고 살던 사람이 동굴 밖에 나와서 태양을 본 것이 말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예수를 통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살아도 여전히 여러 모양의 풍랑을 만나고 그 풍랑들이 무섭다. 그러나 예수에게 일어난 생명 사건으로 거룩한 두려움을 알게 되면 그 풍랑 현상이 미미해지고 잔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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