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2. 21: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상4:9~10)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사주팔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종 공중파에서도 예능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같은 말도 역술인들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사주 때문에 결혼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압권이었다. 궁합을 중요시하는 신랑 어머니가 사주를 보니 “최악의 궁합이라 결혼하면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데 당사자 두 남녀가 어머니가 찾아갔던 그 점쟁이를 찾아가자 이번에는 “궁합이 너무 좋다”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 운명론자들은 생년월일시를 중히 여긴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운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따라 인생이 좌우가 되고 그 운을 바꿀 수는 없으며 낀 액운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집을 옮기고,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기도 한다. 다 운명론이다.
이런 역술인들이나 운명론자들이 볼 때, 야베스는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 ‘팔자가 센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러한 야베스를 가리켜 모든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말한다. 성경은 신앙으로 사는 이들을 일러 야베스처럼 귀중한 자라 말한다. “땅 위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16:3)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이렇게 존귀하다. 이 ‘존귀’에 대해 히5:4는 말한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즉, 존귀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다.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귀중한 자임을 성경은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한 자’로 그 가치를 인정하셨음을 야베스처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복을 주시옵소서
야베스에게는 날 때부터 무언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라.” 앞 1~9절에 많은 사람들 이름이 나오지만 그들 중 아무에게도 그들을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야베스는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묘사를 더하고 있다. 난산이었을까?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날 때부터 치명적인 약점과 고통을 안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 약점이 있다.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나만 알고 있는 핸디캡일 수 있으며 과거의 상처나 물질적 어려움이나 한계, 이런 것들이 약점이 될 수 있다. 야베스는 슬픈 출생의 과거를 안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미래는 밝지 못했고, 삶은 무언가 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기 한계와 약점을 안고도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게 복을 주십시오. 기왕에 복을 주시려거든 정말 많은 복을 주십시오.” 이전 성경에는 이 부분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을 “복에 복을 더 하소서”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야베스가 그토록 사모했던 복은 어떤 복이었을까? 물질적 풍성, 건강, 행복한 결혼 생활, 자녀들의 좋은 직장, 등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구하는 축복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그 이상이 의미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 그 초자연적인 은혜가 삶에 흘러 넘쳐흐르는 복을 말한다.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넘는 하나님의 풍성이 삶에 다가오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다.
야베스는 이런 하나님의 복을 구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확신을 가지고 자기 삶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을 구했던 것이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비밀한 은혜를 달라고 그는 부르짖었다. 만복의 하나님이시고 복의 근원이신 분, 복의 본체가 되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가 복을 구함은 당연하고 바른 기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책임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복은 나눠 주어야 하는 복이요 섬겨야 하는 복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내게 주신 복으로 인하여 나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는 존재, 복을 나누어 주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자격 없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이 세상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부동산업을 하는 집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기도문구이다. 그러나 야베스의 이 기도문은 속물적인 기도가 아니고 세속적인 요청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의 지역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고도화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는 점차 더 자기중심적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나 자신, 내 가족, 내 소유. 지금 눈앞의 현실만 급급하게 살기가 바쁘다. 그러다 보니 삶의 비전과 꿈이 너무 얄팍해졌다. 관계가 피상적이고 사람에 대한 깊이를 상실했다. 그렇게 살면서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보다도 더 큰 목적, 더 원대한 인생 목표 설정에 소홀해져 버렸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로 보라! 스케일이 다르다. “하나님, 저의 지역을 넓혀주옵소서.” 그가 이 기도를 드릴 때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약속된 땅을 분배해 줄 때였다.. 각 지파가 땅을 분배받아 자기들의 경계를 알리는 지계표를 설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지역을 넓혀주옵소서.” 거듭 말하지만 그가 지역을 넓혀 달라는 기도는 단순히 더 많은 부동산을 갖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 들어와 사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축복하셔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내 전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내 일하는 사무실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며 내 만나는 사람들 관계가 확장되어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래서 삶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넓히는 일은 우리의 능력과 재주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기들의 능력과 훈련과 경험을 의지하며 지경을 넓힐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 의지하며 우리 약함과 한계를 고백해야 한다. 두 손이 들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야베스라는 이름 뜻은 "고통"이다. 낳을 때도 고통이었고 그의 삶도 고통이었다. 그래서 후반부의 절박한 기도 내용 또한 그런 고통 가운데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태어날 때도 고통이었지만 살아갈 때도 고통이고 근심이고 환난이었던 그의 삶, 얼마나 힘든 인생이었기에 사람들이 그를 “고통아, 고통아”하며 불렀으랴? 그런데 이런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에서 그 믿음의 탁월함이 읽힌다. 비록 이름이 고통이라고 했을지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그를 고통받는 자에서 귀중한 자로 변화시킬 수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지경을 넓혀 주셨던 것이다.
그의 지경이 커지고 규모들이 늘어나니 확장된 만큼 새로운 문제와 도전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인생은 이럴 때, 다시 위기이다.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넘쳐 나기 시작할 때, 그 복이 주는 새 가능성으로 오히려 인생이 무너지고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새 도전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꿈을 안고 이주하였던 이스라엘이 그랬다. 이제 새 나래를 펴보려고 했지만 새 환경이 주는 엄청난 도전 앞에 메뚜기처럼 서 있는 자신들의 초라함을 보았다. 사노라면 골리앗 같고 여리고 성과 같은 불가능한 난제들이 나타날 수 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옵소서.” 때가 왔을 때, 도약의 순간이 왔을 때,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귀중한 자의 기도란 이런 것이다.
자기 힘으로 속수무책인 범람하는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넌 후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4:24)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잡힌 바 될 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기회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간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환란에서만 벗어남에 대한 기도가 아니다. 야베스는 기도하여 고통 중에서 복을 받았고 귀중한 자라 여김을 받고 그의 삶의 지역이 넓어졌다. 그다음이 중요했다.
마무리
성공 뒤에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있다. 잘 나갈 때, 성공 길을 질주할 때 더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은 좋은 것이지만 그 복이 때로 영적 감각을 무딜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을 초래한다. 잘 나갈 때 더 많은 유혹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야베스는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이끌어 가는 상황으로부터 저를 지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런 면에서 바울의 고백이 더욱 큰 울림을 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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