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9. 18:5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12:28-34)
기독교를 향한 세인들의 비난이 넘쳐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향한 모욕 주기도 도를 넘고 있다, 교회가 그 맛을 잃었으니 할 말이 없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했으니 그 돌들 맞아도 마땅하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의 작태가 복음의 본질은 아닐찐데, 더구나 무지한 신자들의 행태 때문에 예수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성경의 에피소드를 제대로 살펴보면, 신앙으로 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사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 더없이 보람 있게 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한 서기관과 예수가 만난 이야기는 그 단서를 제공한다. 앞 11:27에서부터 보면, 먼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찾아와서 예수께 시비를 걸었다. 그 다음 12:13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세 번째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과 관련하여 예수와 논쟁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모두는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도발적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그 도발들은 실패하였다. 모두들 토론에서 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기관이 나와 질문하였다. 이 질문 이후에 다시는 논쟁이 없었다고 마가는 전한다.
가장 으뜸 되는 계명
이야기의 핵심 절인28절을 다시 본다. “서기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이는 율법의 본질,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가능한 질문이었다. 이전에 나오는 질문자들은 예수께 매우 적대적인 질문을 하였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이전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를 존중하는 태도로 질문하였다.
그런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는 간결하고 확실하게 핵심을 제시하였다. 29-31절.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 하나님 사랑함이 형제 사랑의 밑바탕이라는 것, 이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안 되기에 분명히 하고자 첫째 둘째라는 순서까지 매겨서 말했다.
이에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대답하였다. 두 가지 사랑을 말씀하셨지만 이 둘은 하나의 계명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있을 때 완성될 수 있는 하나의 계명인 것이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이 계명이 완성될 수 없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이 계명이 완성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 계명 가운데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 둘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근본인데 그 근본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구현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요일4:20-21.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서기관은 예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공감했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막12:32) 맞장구를 치며 감명을 나타내었다.
원문 성경에는 ‘옳습니다’라는 이 부분이 '칼로스'라는 대문자로 쓰여있다. ‘칼로스’는 ‘좋다, 아름답다’는 뜻인데 이 서기관이 예수의 해석을 정말 좋게, 아름답게 느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많은 율법 조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했던 학자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데 예수의 결론과 같음을 들으니 어찌 기뻐지 않았으랴?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아니라 서기관이 한 말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뭔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다수 율법학자들은 종교 규칙으로서 율법을 강조하고 감사하는 게 고작이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피를 흘리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 안식일을 범하지 말 것” 등, 당시 유대교에서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설령, 사랑한들 그 이웃은 유대인들, 그것도 가까운 친척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서기관은 그 많은 가르침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핵심인가를 물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진짜 신앙인가를 물었다. 이 서기관처럼 진리에 목말라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애쓰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하늘의 생각에 이르렀을 때의 그 기쁨, 이 서기관은 그런 기쁨을 경험하였다.
그 나라를 위하여
오늘 나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안위, 편안함, 돈, 자신의 탐욕 등. 사람들이 기독교를 조롱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말한 것만큼 행하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무성하나 그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애써 찾는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내 이익을 위해, 나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사람이 육체로 살기에 자기 안위와 편안함, 풍요를 추구함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해도 그것을 제어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위험한 세상에서 불안한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그러나 종교는 그런 자기 안위와 축복에만 붙잡혀 사는 것에서 벗어나는 데까지 이른다. 더구나 기독교는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는 종교이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 가르침, 그 근본적 가르침이 완성되는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사랑으로 채워진 나라, 그래서 모든 존재가 존중받는 세상,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삶이다.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나라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땐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사11:6-9)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다. 그 나라는 종교 규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삶 위에 세워진다. 이런 계명을 깨달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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