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한가위

2021. 9. 19. 20:1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1-19)

 

정상적인 예배가 중단된 채 두 번째 한가위를 맞았다. 역병으로 예배가 사라진 이 참담한 시절에도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감사'가 흐른다. 이런 감사는 단순히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신 것 자체에 대한 감사였다.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

구약 기록에는 3가지 화목제가 나온다. 화목제는 은혜에 감사하는 행복의 제사인데 첫째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 둘째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미리 드리는 감사, 셋째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로서 조건을 뛰어넘는 화목제이다. 처음엔 조건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로 변해간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54:6). 주의 이름에 감사하는 이 마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감사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감사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하박국의 신앙 또한 이런 감사였다.

 

요즘 사람들은 감사에 인색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어찌 오늘의 사람들 만이겠는가? 일찍이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고 한탄한 바 있다. 한센병 환자 열 명이 예수께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중 한 명만 돌아와 감사하였다. 감사를 모르는 그 아홉을 한탄하신 예수는 돌아와 감사한 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다. 신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 질병까지 해결해 완전한 치료를 해 주신 것이다.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상, '감사''믿음''구원'은 하나이다.

 

감사는 깊은 종교적 태도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고마움을 모른다. 더구나 자기가 이루었다 여기는 것에는 감사한 마음이 없다. 대체로 감사에 인색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은 그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지이고 철학의 빈곤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실상 자기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들이다. 인간이란 벌거숭이로 왔다가 벌거숭이로 떠나는 존재이다. 자신 스스로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면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주어진'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14). 이런 깨달음에서 감사가 나온다. 그 베풀어진 것의 일부를 바치는 감사로 자기 유한성과 일시성을 고백하니 감사는 그 본질이 종교적이다.

 

영어권에서는 '감사'를 "thankful"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고대에서는 이 말이 "thinkful"과 같이 쓰였다. 고대 사람들은 '감사'와 '깊은 생각'을 같은 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 나의 이 생명과 오늘 이 하루가 당연한 것인가? 여기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온 것인가?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 나의 성취물인가? 인간의 품위를 가장 떨어뜨리는 것 중 하나가 감사에 대한 무지이다. 짐승도 감사를 알거늘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예수께 돌아와 고마움을 고백했던 사마리안 한센병자, 그는 감사를 앎으로서 구원을 얻어 더 품위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도 입만 열면 감사를 말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5-7).

 

항상의 감사

정말, 이런 감사의 삶을 살고 싶다. 항상 감사로 충만했던 바울의 편지에서 그 비결을 찾아본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7).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네 가지는 모두 수동태이다. 직역하면 주 안에 '뿌리를 박히고,' '세워지고,' '믿음에 굳게 섬을 받아,' '감사함이 넘처지게 하라'는 말인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네 가지 중에서 첫 번째 '뿌리를 박히다'는 완료형 시제이니 예수 안에 이미 '뿌리가 박혀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그 결과로 우리의 믿음이 나무처럼 '세워지고,' '굳게 섬을 받고,'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감사가 넘치게' 된다.

 

모든 시작이 예수와 연결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사람들은 보이는 초목의 아름다움에만 감탄하느라 그 풀과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의 고마움을 모른다.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들,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한 것들은 사실 보이지 않는 은혜들이다.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그림자 노동'들이 곳곳에 있다. 어머니와 노동자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매일의 우리 삶이 가능하도록 보이지 않는 이들의 수고가 있었던 것이다. 신앙의 눈은 그 꽃과 열매를 맺게 한 뿌리, 보이지 않는 은혜들까지 보게 한다.

 

결론

결국 감사는 나눔으로 완성된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 이라면서 선물처럼 받은 은혜였기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며 살았다. 그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2-13)고 했다. 당시 기독교 가정에는 양초와 담요, 그리고 마른 빵 세 가지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언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양초가 필요했고 그가 굶주렸을 테니 신속히 마른 빵을 준비했다가 제공해야 했으며 그가 잠을 잘 때 덮을 수 있도록 담요를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철저한 감사 신앙으로  삶을 실천했다. 그 힘이 초기의 박해에서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중심 뿌리가 되었다. 이런 삶이 하늘의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이다. 상실과 우울의 시대에 닥쳐온 한가위, 그럼에도 감사를 잃지 말자. 그 감사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그 아홉이 되지 말고 돌아와 감사함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는 하늘 축복을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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