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8. 13:1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사9:6~7)
언제부터인지 정치 집회 현장에 기독교인, 교회 집단의 표식들이 나무하고 있다. 집단의 힘, 정체성이라는 물리력으로 자기들 힘을 보이고자 함 이리라. 하지만 그런 작태들에 눈살이 찌푸려짐은 왜일까? 어떤 이들은 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정말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하고 붙이고 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 표식이었다. 초대교회 당시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된 문제였었다. 즉 목숨 내놓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1. 예수쟁이의 정체성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분을 표시할 때는 서로 암호로 표시하였었다. 그때 암호로 쓰였던 것이 물고기 그림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같음에도 미심쩍을 때, 곁에 다가가 슬쩍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을 보고 반색하는 이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 물고기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익뚜스’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첫 글자들, 그것들을 연결시키면 ‘익뚜스’ 즉 ‘물고기’였기에 초대교인들이 자신들의 암호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진다. 아니 결론지어져야 한다. 그래서 사도신경 중에서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내한 고백 내용이 가장 많다.
<타이타닉>의 감독이었던 카메룬이 만든 <예수의 무덤>이라는 다큐가 있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열 개의 석관 중 몇 개에 새겨진 비문을 탐사한 기획물이었다.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아, 예수의 아들 유다’라는 비문 문구들에 유추하여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유다라는 아들까지 낳고 오래오래 살다가 죽어 그 무덤에 묻힌 것이라는 주장, 물론 단지 추리이고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한 때 <다빈치 코드> 같은 이슈도 유행하여 예수의 죽음을 부인하는 풍조들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예수 당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이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자녀 이름으로 가장 선호했던 작명들이었다는 말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 사내아이는 예수였고 여자아이는 마리아였다.
그러니 <다빈치 코드>의 그 무덤도 당시 그런 흔한 이름을 가진 어떤 가족의 무덤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흔했던 예수라는 이름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왜였을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름은 악명 높은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레로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자녀들에게 주는 것을 꺼렸다. 그런가 하면 예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이름이 너무도 고귀해서 차마 자녀에게 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지금도 잘 안 쓰는 이름이 되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흔한 이름이었다. 실제로 구약 성경과 산약 성경 곳곳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다. 구약의 여호수아, 예수아, 호세아 등은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과 정확히 같은 이름이다.
2. 왜 굳이 예수라는 이름인가?
하나님은 왜 당시에 흔하디 흔했던 이름 예수를 당신 아들에게 작명해 주었을까? 사람들이 잘 쓰는 않는 이름을 붙여 주었더라면 더 신비롭지 않았을까? 한 동네에서도 ‘예수’ 하고 부르면 수십 명이 돌아보게 하였던 그 흔해빠졌던 이름 예수였을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1:21) 하나님이 직접 당신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 ‘예수’는 그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다’였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사상에 역설적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그들 나름의 구원관에 의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반드시 정치적, 군사적으로 구원하셔서 속히 다윗 왕국의 회복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이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기대를 엎어버리고 그 생각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성자 이름도 예수로 작명하였다. 그 아들 예수는 유대인들의 정치, 군사, 물리적 구원을 위해 보내어진 이가 아니라는 것, 인간이라는 그들 실체를 죄에서 건져낼 자로 보내졌음을 확인시켜 주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대가 듬뿍 담긴 ‘예수’라는 이름을 당신 아들의 이름으로 택하여 그 메시아 ‘예수’가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다른, 완전히 다른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는 메시아임을 보여주었더. 그렇게 함으로써세상 사람들의 구원관과 하나님의 구원관, 속물들의 메시아관과 하늘의 메시아관을 뒤집어버렸다.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의 아들 예수가 그들을 구원할 자가 맞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 군사적 구원이 아닌 죄에서의 구원을 이룰 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아들이 ‘유일한’ 구원자이니 또 다른 예수를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였다. ‘구원’은 포괄적인 용어로써 이 세상 모든 어그러짐의 회복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으로 온전하게 됨이 구원이라는 포괄적인 뜻인 것이다. 사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피폐는 모두 영적인 뒤틀림에서 기인하였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틀어지자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어그러짐이 닥쳐왔다. 그러니 모든 것에서의 구원은 영적인, 즉 하나님과 관계 회복에서 시작된다.그래서 구원이란 ‘죄에서의 구원’이라고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와 구원과 죄
이렇게 구원은 죄와 관련된 단어이지 여기서의 세상 행복과 풍요에 관한 언어가 아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시130:7~8)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죄의 무서움을 모른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공감도, 열정도 없다. 단지 세상에서의 평안과 풍요를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 개념도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의 절정 정도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 백성들을 죄에서, 악에서 구하느라 열심히 일하는데 정작 우리는 자기 소원이나 비전, 야망을 이루어 달라고 거기에만 착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심사들이 만연하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 잘못된 생각을 깨고 들어온다. 내 소원과 야망을 깨고 오는 것이다. 인간들이 기다리는 정치적 영웅, 군사적 지도자, 물질적 성공 부자를 거부하고 죄를 씻어 악으로부터 지켜내고 건져낼 진짜 메시아라는 구원자를 보낸다. 하나님이 왜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가? 나를 죄에서 건지려는 것이다. 왜 때로 우리에게 병을 주는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다수의 인간들은 자기 소원이 풀리고 현안이 해결됨을 구원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런 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독사의 새끼’라 욕했다. 그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 죄에서 건지고자 가난, 질병, 사건과 사고를 때로 허락하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죄의 무서움과 파괴력을 깨닫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복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치밀한 계획과 능력으로 섭리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때로 자기 죄에 치를 떠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 내 치부와 죄를 드러내기도 하여 나로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그런 상황을 허락하는가? 왜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지 않고 왜 죄짓는 것을 말리지 않는가? 아버지라면 자녀가 죄 짓는 것을 아버지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말려야 했다. 그러나 강제로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인격적으로 기다려 준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죄에서 떠나도록 만들기 위해 그런 일을 허락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함이다.
결론
예수는 성공주의에 빠져있는 오늘의 교회들이 원하는 세속 힘을 주러 온 분이 아니다. 그가 온 것은 당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면서 애용했던 ‘예수’라는 이름을 메시아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그 이름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준 이유는 하늘 아래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자는 예수 하나뿐임을 극명하게 천명함이었다. 그러니 예수에게서 구원을 보아야 하고 그 예수를 소개하는 성경에서 구원을 읽어야 한다. 그 예수 외에 인간의 품격, 인간의 세상 성공을 돕는 메시아를 말하거나 자처하는 그 어떤 것도 가짜들이다. 이런저런 가짜들이 횡행하는 오늘의 세상에 정신이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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