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8. 15:4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시130:5~8)
바야흐로 대선이라는 정치 계절이 돌아왔다. 지난 정권의 몰락으로 세로 등장할 정치 집단에 사람들의 기대는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자랑스러운 나라, 탄탄한 국가 힘으로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함이다. 그래서 살만한 나라, 남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도 그랬다. 그들도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 자신들의 처지를 구원해 줄 것이라 기다려왔었다. 2000년전 그들이나 2025년 오늘의 우리들이나 그 기대 이면에는 결국 먹고사니즘, 더 나아가 잘사나즘이라는 돈, 명예, 성공에 대한 현세적 구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1. 떡보다도 더 중요한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단호하게 말했다. ‘나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를 주신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구원이라는 진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4~36) 여기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것은 세상 방법과 현실적 능력으로 자기를 보호함이다. 파수꾼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아침이다. 이는 그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처지를 빗댄 표현이다. 하늘 백성은 먹고사니즘보다 그 나라를 더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교회들이 회중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여기 현실, 이 세상에서의 문제 해결들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과연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피폐와 공허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천하 어느 인간도 예수 이외의 행복이라는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것은 없다. 성경에서 그렇게 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그 예수가 주는 떡고물에 관심을 두는 인생들이 많다. 너무도 많다. 그런 신앙은 세속 메시아로 이끌어 자기들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예수를 다시 못 박아 죽일 수도 있다. 실제로 현실에서 그렇게 세상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여 교회를 떠난 이들도 많다. 아니 심지어 종교 행위를 복 받기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한 선교사의 저서 <내려놓음>이라는 책에는 이런 예화가 나온다. <어떤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 자기 원하는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그 장난감이 그 아이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산대에 그 장난감을 내려놔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으면 자기 것이 안 된다.> 혹,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잠시 손해 보고 섬겨주며 예배당에 나와 주고 있지는 않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헌금해 주고 봉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 신앙생활일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계산대에 잠시 내려놓는 것은 진짜 내려놓음이 아니다.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진짜 내려놓음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림이다. 빼앗김과 버림은 전혀 다른 것이다.
2. 빼앗김과 버림
빼앗김에는 강탈당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마음에서도 지워진다. 신앙은 세상에서 미련 없이 내려놓음이다. 너무도 아깝지만 복 받기 위해 억지로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림이다 함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으로 사는 우리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시체들이다. 시체는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삶의 매 순간마다 내려놓음이라는 그의 고백이었다. 그렇게 자기 욕망과 욕구, 욕심과 소원, 비전과 야망을 죽여 갔다. 루터도 ‘나는 날마다 세례를 받는다’고 했으니 역시 죽는다는 말이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에 매달린 시체가 되어가는 것이지 가짜 내려놓음으로 내 것 추구함이 아니다.
과거 부흥회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석유왕 록펠러 이야기, 록펠러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더니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느니, 그래서 십일조 떼먹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가 십일조를 계산하는 사람만 수십 명을 고용하여 십일조를 정확하고도 꼬박꼬박했다는 이야기 들. 하지만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미국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기업이었다. 매수와 뇌물과 사보타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들을 무력화시키고 거대 독점 기업가로서 근로자들의 임금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착취했으며 정유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릴 수 있는 막강한 독점력으로 엄청난 재산을 끌어 모았다. 심지어 형편없는 작업환경에 견디다 못해 파업을 한 노동자들의 천막촌을 민병대를 시켜 기습하여 50여 명이나 사살했던 인물이 록펠러였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왜 오늘날까지 이렇게 비싼 민영화에 머물러 있는가? 록펠러 재단이 미국의 의학기술 발전과 의료계를 자신들 원하는 방향으로 주무르기 위해 막대한 동력을 제공해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십일조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십일조 해야 하나님이 재산을 더 많이 불려 준다는 신념하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고 헌금도 아니다. 단지 투자일 뿐이다. 록펠러뿐이겠는가?자기 원함을 얻기 위해 종교행위를 징검다리 삼는 기회주의자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보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 간다.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내 삶에서 예수 외에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돈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실패와 질병을 허락하기도 한다.
3. 당신의 친백성이기에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간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친백성이기 째문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친 백성들이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여기 ‘자기 백성’은 민족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오해해 왔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친백성들이 있었다. 다만 그런 자들은 자기 노력이나 성과에 의함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었다. 즉, 구원받을 ‘자기 백성’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결정된 그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이 당신의 친 백성이라 부른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9~10) 고린도 도시에 창세전에 택해 놓은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러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다른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독려였다. 바울은 이 말씀을 듣고 고린도 교회에서 1년 6개월을 더 머물며 말씀을 가르쳤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지는 사도행전에 나온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어떤 이들이었던가?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곳에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빠져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똑똑하고 유식하고 많이 배운 사람일지라도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믿는다 해도 엉뚱하게, 이상하게, 자기 방식으로 믿는다. 이만희의 신천지 집단, 문선명의 통일교 집단에도 석박사, 대학교수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지성인들이 어떻게 그 황당한 소리에 넘어갈까? 인간의 우매함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혹할 수 있다. 그 어마어마한 자금들, 막강한 조직과 활동들이 하나님의 역사 현상이라 보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들, 그렇게 보이는 현상이 정말 진리일까?
결론
나침반을 잃어버린 오지 탐험가들은 어떻게 방향을 찾을까? 북극성을 찾아 방향을 잡는다. 그런데 그 북극성 빛은 언제 출발한 것인가? 700년 전에 출발한 빛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1338년이니 고려말에 출발한 빛이다. 그러니 우리의 오늘을 보이는 현상에서 이해하려 말고 영원에서 보아야 한다. 700년 전에 출발한 북극성 빛이 오늘 현실로 나타난 것이 과학인 것처럼 수만 년 전, 아니 수천억 년 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들어 있던 사건들이 역사라는 공간 속에서, 인생이라는 나의 시간으로 전개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그림은 하나의 평면이었다. 그 영원을 기다리는 우리는 현실의 파수꾼이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들이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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