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소망

2025. 3. 23. 19:37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24) 

 

 

믿음으로 사는 우리 심중에는 항상 ‘우리는 선한 편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선한 우리의 반대편, 즉 대적에 대한 정체는 모호하다. 말로는 마귀, 사탄, 죄 등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라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되는 것? 무례하게 사는 것? 또는 법규를 무시하며 사는 것? 이렇게 사는 자들이 대적자들일까? 단지 이런 것들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삶이고 그 반대 삶인 죄의 삶, 마귀의 삶일까?

 

1. 세상에서 이겨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세상을 악바리처럼 이 악물고 이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김일까? ‘어떤 이들은 더 좋은 구원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6~38)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니?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묘사되었을까? 성경은 그들이 희롱과 악형과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으면서 유리하다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이겼다는 말이 없다. 그냥 죽었다. 한 마디로 세상에게 끝장난 것이다.

 

그랬더니 반전이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네가 내 군병이다’ 하며 그렇게 산 이들의 오른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승리는 세상에서 외롭게 고립되고 희롱당하다가 결국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병이 되어서 그렇게 싸워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기어코 그렇게 죽지 않으려 애쓰는 ‘나’이다. 진리를 위해 헐벗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위해 감옥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독기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독이 오르면 목이 곧아지는 대표적인 짐승이 뱀이다.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야단칠 때 흔히 쓰던 호칭이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즉 하나님이 출애굽 한 당신의 백성에게 수시로 ‘이 뱀 새끼야!’라고 욕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의 독 오른 목을 꺾어 버린 곳이 광야였다.

 

그것이 구원이었다. 그래서 예수도 당신을 쫒겠다는 이들에게 유사한 말을 하였다. ‘내 멍에를 메고 나를 쫒으라’ 여기서 예수가 말한 멍에가 무엇인가? 멍에는 소의 목에 걸어 소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내 임의대로 살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처지이기에 그 예수와 일치된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 히브리인들의 결혼 풍습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반드시 주어야 하는 빙패물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열 개의 드라크마로 만든 목걸이였다. 이를 잃어버리면 신부는 소박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큰돈이 아님에도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것이다. 그 목걸이는 신부가 평생 신랑에게 순종한다는 약속 표였으니 곧 연합이라는 개념이었다.

 

2. 목이 곧은 백성

바울은 그 풍속을 신랑 하나님과 신부 교회의 연합 개념에 차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였다. 이 세상에서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랑 예수께 완전히 의존되고 복종되는 자이어야 한다. 그렇게 처음 자리로 가는 것이 내 안에 있는 뱀의 죽음이다. 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던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바보로 살지 말라는 속삼임이었다. 그러니 그 뱀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엎어지는 것은 내 안의 마귀를 죽임이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이기에 이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환란이라 한다. 구원받은 이후,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이후에도 목이 곧은 백성으로 불렸다. 목이 곧은 백성, 이는 곧 뱀이니 우리는 지금도 뱀처럼 산다. 이것이 우리 실존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뱀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목이 곧은 백성인 것이다.

 

그런데 구원은 우리가 뱀이었을 때 일어났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다는 말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롬5:10) 그러면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우리가 거룩한 자, 성자가 되었나? 정말 그런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금의 내 모양을 보면서 불안해하고 있다. 심지어 그 불안은 자신의 구원받은 사실조차도 의심하게 만든다. 그때 바울이 말한다. ‘너희들이 뱀 새끼였을 때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너희를 구원해 냈는데 지금 그분이 살아나셨고 너희들도 지금 구원된 상태이다. 그런데 그의 살아남이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자꾸 너희들 꼴을 보고서 실망하는가?’ 뱀이었을 때도 구원했는데 실수 좀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시 지옥에 넣겠는가?

다시 뱀으로 만들겠는가?‘

 

그러니 인간중심주의자나 종교계율주의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역사에서는 땅의 왕들이 하늘의 왕들을 죽이는 모양새가 십자가였던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니 역사와 인생 전체가 그런 모습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역창조라고도 한다. 그 역창조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죽는 것이 당연했다. 하늘 왕이 땅의 권세에게 맞아 죽는 것, 십자가란 그런 것이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하늘의 왕이다. 하늘의 왕인 우리는 세상 왕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맞다. 이런 그림을 명확하게 그려준 곳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였다. 그 아벨의 죽음으로 탄생되는 하나님의 후손 셋의 이야기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가인의 후손들은 농업, 과학, 기술, 예술, 심지어 미모의 딸까지 모두 그 후손들에서 나왔다.

 

3. 주의 이름을 불러

이런 것들이 세상의 힘이다. 또한 이 세상의 주관자들인 가인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살았고 가인의 악함도 그 후손 때에 가서는 77배로 늘어났다. 그렇게 멸망으로 가는 역사의 악이라는 죄가 확산성과 점진성을 발휘해 나갔다. 직선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시간이 시작 됐으면 끝이 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끝이 멸망이니 가면 갈수록 죄와 악이 더욱 확산되고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지리멸렬하게 지낸 듯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아벨을 잃은 후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여 낳은 셋도 그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에노스였다. 가인의 후예들과 달리 에노스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며 살았다. 이것이 이 땅에서 부정되고 부인되는 과정이니 곧 그들의 죽음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셋의 후손들을 가인의 후손들 문명에서 밖으로 계속 밀어냈다. 낫 하나 벼르려 해도 가인 동네에 가서 부탁할 만큼 그들은 세상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 이름만 부르며 살았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는 삶, 정말 주의 이름만 부르면 모두 구원받는가?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다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받는 것 아니다’는 예수의 이 말은 무엇인가? 바울의 말이 맞는가> 아니면 예수의 말이 맞는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그렇다. 믿음이 개입하는 것이다. 믿음이 들어가서 구원받는 자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이런 이들은 자기 힘과 성과, 세상 어떤 것으로 구원에 이르려던 시도를 중단하게 된다.

 

이사야는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니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64:6)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실존이다. 그런데 거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만들어 냄이 하니님의 구원이다. 내 힘으로는 그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육의 죽음이다. 그렇게 셋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늘 소망으로 살았다.

 

결론

십자가 세례, 이것이 처음 창조의 우리 마음 찾기이다. 하나님 절대 의존의 마음,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양심,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그렇게 하나님만 찾게 하는 삶이 세상 인간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미련하고 무책임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이런 하나님의 소망 안에서 살기에 불안한 이 시국에도 우리는 흔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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