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0. 12: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단7:9~12)
세상이 더 극악해져가는 것 같다. 마땅한 일이 이상한 일이 되고 상식적인 예상들이 버젓이 빗나가기가 일쑤이다. 작금에는 비겁한 일들도 말 한마디로 강변해 버리는,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실종된 세태를 사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풍경들이 믿음의 인생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종말 때가 다가오면 사탄이 총력을 기울여 하늘 백성들을 핍박한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놔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요한계시록에는 그 때 우리가 그런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고 기록해 놓기까지 하였다.
1. 두 증인이 죽다
요한계시록의 증언에 의하면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죽는다. 어디서 죽는가? 큰 도성 길가에서 죽는다. 큰 성은 다른 말로비벨론 도성을 말하는 바 곧 이 세상을 상징한다. 그 성에서 죽는다 하니 교회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죽는 자, 밀리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 하늘 왕 예수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핍박 끝에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그 삶이 하나님이 원한 삶이었고 진짜 이기는 삶이었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교회 공동체도 같은 예수의 삶을 살게 된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 궁극은 그것이 이김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도하고 팽창시켜 홀리 시티를 이 땅에 이루는 공동체가 아니다. 악을 더해가는 세상 기만과 편법에 죽임당하는 공동체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몸이다.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했듯이 교회도 그 죽음 뒤에 영광이 있다.
이런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의 전쟁을 겪는 것이 교회 모습이고 우리 삶이다. 그리고 이런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이 전쟁은 마지막 날 어느 때 한 번 있는 전쟁이 아니다. 지금도 내 삶에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이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영적 전쟁이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의 연장 선상에 항시, 어디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노출되어 있다. 이 전쟁의 강도는 우리가 신앙인으로 성숙되어짐에 따라 더 격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 현장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제대로 된 하늘 백성으로 살고 있지 않으니 그 삶에 전쟁이 없는 것이다. 하기야 어차피 사탄의 편처럼 살고 있으니 그 삶에 무슨 거룩한 전쟁이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인생들은 이 심각한 영적 전쟁을 매일 매일 치르고 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만이겠는가? 회교권에 있는 기독교 선교사들 뿐이겠는가? 아니다. 그들만 영적 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어느 때에, 어떤 모양으로든 하늘 삶이 있는 곳이 전쟁터인 것이다. 내 삶이 이런 핍박과 고민에 직면해 있음은 나도 동일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왜 성경으로 그렇게 핍박받는 교회 모습을 우리에게 읽게 하는가? 우리의 치를 영적 전쟁 상태가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심각한 것이라는 것, 그러니 대충 안일하게 살려 말라고 오늘의 우리에게 읽게 하는 것이다. 내 삶이 안일한가? 그저 시끄럽지 않고 평온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하늘의 중인들이다.
2.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래서 예수는 우리 교회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아무 기도나 하고 끝자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되는 주술 마무리인가? 그렇게 기도하면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인가? 아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함은 그의 수준으로, 그의 뜻으로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주겠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림이다. 이런 기도라야 하나님이 KS인증 마크를 찍어주는 기도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의 의미이다. 그러니 기도는 내 욕망의 배설이 아니요 집단의 비전을 내건 협상도 아니다. 정말 예수를 아는 이들은 그 예수의 수준에서 구하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가 직접 가르쳐 준 주의 기도는 그 예수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은 그 기도가 내 염원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소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인 그 예수의 소원이 안 들어질 일이 있을까? 당연히 이루어진다. 구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시험에 들지 않게, 그리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졌는가? 물론이다. 이미 이루어졌다. 영적으로 다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삶의 전쟁에서 안전하다. 광야에서 예수가 시험을 먼저 받았고 악으로부터 완전히 승리하여 천사들의 시중까지 받았다. 처음 아담은 실패하여 천사들에게 쫓겨났지만 새 아담으로 온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고 천사들로부터 시중을 받았다. 천사들 뿐인가? 그 광야에 짐승들까지 와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런데 시험을 이겨낸 그 광야에 천사까지는 이해되나 함께 했다는 짐승들은 무엇인가? 이는 예수가 시험을 이김으로 광야가 짐승들도 사는 에덴으로 회복됨을 계사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이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을 곡해하여 가끔 이상한 이들은 예수 잘 믿으면 에덴을 회복하고 거기서 사는 줄로 믿고 주장한다. 태초의 처음 창조 때처럼 옷도 필요 없이 벌거벗은 나체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해이고 코미디이다.정말 하나님이 에덴에서 벗겨놓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를 구원했겠는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요한계시록의 의로운 세마포를 입은 하늘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져가는지를 보여주고자 구원을 설계하고 우주와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은 오직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는 말이다.
3. 다시는 선악과가 없는
그래서 에덴에는 선악과가 있었지만 예수로 인해 시험을 이기고 완성된 세상,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가 없다. 거기에는 오직 생명나무만 있다. 그럼에도 선악과가 있는 그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2000년 광야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가 시험을 이길 때 우리도 그 예수 안에 함께 있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가 그 예수 안에서 물질, 지식, 영웅주의로의 유혹이라는 시험을 모두 이겨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험에서 당연히 우리를 건질 것인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 오직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이다. 지금의 나를 보라. 현실을 사는 우리의 실체가 어떠한가? 매일 매일 시험에 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 인생들은 매순간, 사는 날 동안, 아니 모든 경우에서 그 사탄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아마겟돈 전쟁터의 하나님 반대편에 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마치 사탄 편인 것처럼 매일매일 실패하고 실수하며 산다. 그럼에도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간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이 원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게 한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증언이다.그렇게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약속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기에, 그래서 시험에 실패하여 사탄의 편이라 해도 할 말 없는 인생들일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로 선택한 인생들을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간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열심히 공격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오늘의 마귀는 총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칼로 공격하지도 않는다.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우리 이성을 동해서 공격해 들어온다. 한 공학박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질량 있는 물체는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없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는 육체를 갖고 있었다. 이는 질량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천국은 삼층 천, 그러니까 저 우주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빛의 속도로 200만년 거리이다. 1초에 30만 킬로미터로 달리는 그 빛의 속도로 200만 년을 가야 하는 거리, 그러니 예수는 지금 빛의 속도로 가고 있어도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못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가? 정말 예수가 하나님이라 믿는가?‘
결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도 아울러 창조한 분이다. 그런 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대로만 달릴까?‘ 인간의 수준이란 것이 고작 이 정도이다.할 수만 있다면 신을 부정하려 애쓰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속성이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 이성으로 신을 밝혀 보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나님은 이성의 한계 너머에 계신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럼에도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의 이성을 자극해서 유혹한다. 이성은 종교 다원주의를 만들어 자기들 이해 안으로 하나님을 제한했다. 인간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기원전 5세기의 피타고라스 정리도 아직 이해 못하는 인간 이성으로 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마귀의 이성과 죄성 자극으로 시험에 들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지고 열려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이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11:7~10)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이름 예수 (1) | 2025.04.28 |
---|---|
오직 우리를 위하여 (3) | 2025.04.10 |
부끄럽지 않은 소망 (1) | 2025.03.23 |
신분에 맞는 삶 (1) | 2025.03.23 |
이 백성들이 사는 법 (0) | 2025.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