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0. 12:4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사40:12~17)
길고도 깊었던 불안, 혹시나 하는 암울함들이 일단락 되었다. 최고 권력자 탄핵으로 거리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고 사람들 얼굴에는 희망에 대한 미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제 역사는 한 장을 접고 또 다른 장의 시작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것이 다 무슨 일인가? 꼭 필요한 일이었던가? 하나님 안에서는 이 일들, 이 일련의 과정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친히 이 천지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리적으로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1. 유효한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보편적 부르심’과 ‘유효한 부르심’이 있다.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당신의 나라로 부르셨다. 그런데 타락한 이래로 인간들에게는 죄로 인해 그 부르심을 들을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니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사망의 운명이었다. 이것이 기본이고 상수이다. 그러나 그중에 어떤 선택된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를 부었다. 그래서 그들로 당신의 초대 음성을 듣게 하였으니 이를 ‘유효한 부르심’이라 한다. 이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반응을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믿음은 은혜로만 주어진다. 결코 내가 수고한 것으로나 이루어 놓은 성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9)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선물로 준 믿음에 의해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때문에 무조건적인 죄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용서는 거룩과 공의라는 당신의 속성과 맞지 않는 위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 된 인간들을 벌해야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언명한 바 있다.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공의로 처벌하고 사랑으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자격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처벌받고 대표하여 살아나는 어떤 존재가 필요했다. 선택한 당신의 백성들 죄를 모두 짊어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일을 맡겼다.
2. 대신하고 대표하여
그런데 하나님인 성자 예수는 인간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대표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할 자격은 있지만 그 인간들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은 다른 것이다. 원숭이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는 원숭이밖에 없고 호랑이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는 호랑이밖에 없는 것이다. 원숭이의 대표로 개미가 나설 수는 없다. 인간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와야 했으니 그것이 성육신이었다. 만약에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벌 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하늘에서 벌 받고 끝냈을 일이다. 하지만 인간을 대표해야 했기에 인간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인간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니 특정 시대 특정 민족 특정 문화에 와서 아기 할례를 시작으로 율법을 지켜야 했다. 구원은 무죄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으로 상징되는 율법, 즉 유대인 문화와 그들의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지켜낸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삶에서 율법을 모두 지켜 선악과를 먹지 않은 삶을 십자가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인간에게 전가시켜 인간의 죄 문제와 의의 문제를 해결시켰다. 그렇다면 이왕 그렇게 구원할 것인데 왜 일부인가? 왜 모두 구원하지 않았을까? 이 도발적인 질문에서 소위 ‘보편 구원론자들’이 생겨났고 많은 이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할 것이라는 주장에 같은 인간들 처지에서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논리는 더 비약하여 당연히 지옥도 없다는 강변까지 내세웠다. 이런 주장에는 고결한 휴머니즘이 묻어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아니다. 같은 인간으로서는 안타깝지만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아니라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이 아니라 그중 당신이 선택한 자들만 구원하겠다고 성경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9)
3. 이미 창세전에
성경의 명제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냄은 창세전 선택된 자들만을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그들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였으니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요 영원의 중심들이다. 그들에게 다시는 타락할 수 없고 죄에 빠질 수 없는 나라를 주기 위해 설명용 교보재로 선택 밖 인간들과 사건들과 상황들을 역사라는 시간 안에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 백성 이외의 모든 인간과 만물은 우리의 완성을 위해 창조된 엑스트라들이다. 그러니 인간 그 자체가 존귀하고 모두 동등한 존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런 이야기가 인간주의자들, 아담주의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확연하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우주를 경륜하고 있고 우리만이 그 나라에 들 수 있다. 이런 말씀에 펄쩍 뛰는 아담주의자들 항의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9:22~23) 진노를 퍼붓고자 창조한 자식들이 있고 영광 주고자 창조한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는데 인간들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냐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배제된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서 단지 흙이요 티끌일 뿐이지 않는가?
기독교인의 삶은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를 증명하고 실천함에 있지 않다. 인간은 티끌에 불과한데 그중 어떤 자들에게 은혜가 임하는 영광이 허락되었다는 것, 성경의 이런 증거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으로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하고도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밖에 있는 것들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일뿐이니 대통령도, 유명인사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생들이 각기 자기 전문 분야에서 열심히 자기 삶을 달리고 있고 달려왔지만 하나님의 은혜 밖의 인생이라면 결국 지옥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타는 땔감일 될 뿐이다.
결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는 지옥을 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아담의 불순종 유전자로 하나님 자리를 탐하려던 내 죄성을 다시 보게 된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17:12) 멸망으로 작정된 자식들이 있고 그들이 가게 될 지옥이 있음을 밝히는 예수의 비유, 그러니 살아있는 오늘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회가 주어진 지금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감사로 사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기회를 준 하나님이 묻고 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1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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