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8. 14: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고전15:12~14)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라는 작품이 있다. 토스카가 사랑한 혁명파 미술가 카바르도시, 그가 사악한 왕당파 경찰서장 스카르피아에게 잡혀가 고초를 치를 때 토스카는 연인인 그를 구하기 위해 스카르피아를 찾아가서 뇌물을 주려 했다. 하지만 스카르피아는 토스카를 흠모해 왔기에 돈 대신 육체관계를 요구했다. 그때 토스카가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아리아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였다. 자신은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았을 뿐 누구에게도 몹쓸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 가혹한 벌을 내리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아리아였다. 결국 토스카는 연인을 위해 스카르피아를 죽였고 연인 카바르도시는 총살당했다. 그 뒤, 토스카 역시 절망 가운데 절벽에서 뛰어내려 비극적 생을 마감한다.
1. 절망 한가운데서
토스카의 아리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관심을 지탄하는 심정을 대변한다. 왜 토스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건만 카바르도시의 총살형을 막아주지 않았는지, 왜 토스카가 절벽에서 투신할 만큼 힘들어할 때 그녀를 찾아가 위로를 해 주지 않았는지, 원망스럽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적인 신음에 응답하지 않는가?’ 평소 품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오페라에서 재연되기에 토스카를 듣노라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분노에 십분 공감된다.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흡족하게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느껴지는가? 왼편에 계신가 돌아보면 거기 없고 오른편에 계신가 돌아봐도 없는 무관심과 침묵, 멀고도 먼 타자로 인식되는 하나님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도 토스카처럼 원망과 고통의 아리아를 빈번히 부른다.
고통과 불편과 불안, 그리고 거기서 촉발되는 원망과 섭섭함과 미움, 이런 것들은 사는 날들의 오늘에 대한 ‘희망 없음’, 즉 ‘절망’에서 기인한다. <고장 난 냉동차에서 동사한 시베리아 화물회사 직원 이야기>는 절망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에 대한 힘을 보여 준다. 화물회사 직원이 고장 난 냉동차 안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짐을 부리는데 그만 그 냉동차의 문이 철컥 잠겼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 냉동차를 끄는 열차가 출발해 버렸다. 그 사내는 냉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살려달라고 악다구니를 다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자신이 그 안에서 얼어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추위가 몰려왔다. 절망은 분별력을 파괴한다. 사실 그때는 봄이었고 냉동차의 냉각 장치도 고장 나 있었다. 그럼에도 다음 정류장에서 그 사내는 얼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이 절망의 힘이다. 희망 상실은 삶의 힘을 빼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흔든다. 실험용 쥐들을 빛이 들지 않는 항아리 속에 가두면 30분에서 3시간 안에 모두 죽는다. 그런데 같은 항아리에 실험용 쥐를 넣고 뚜껑에 바늘구멍만 한 구멍을 뚫어 작은 빛을 보게 해 주면 사흘 이상을 산다. 그렇게 절망은 존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키엘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그의 글에서 그 병의 정체를 ‘절망’이라 했다. 절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하나님에게 불만의 독화살을 쏘게도 한다.
2. 희망에서 소망으로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이 이 절망에서 태어나 절망 한가운에서 살다가 절망 중에 죽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경은 우리에게는 희망 중의 희망이 있다고 증거 한다. 희망 중의 희망, 번복될 수 없는 희망, 그것이 무엇인가? 소망이라는 것,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위로하고 있다. 소망은 희망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희망은 언제든지 번복될 수 있고 실패될 수도 있지만 소망은 확정된 희망이다. 그러니 절대 실패될 수 없고 번복될 수도 없다. 소망을 가진 이들은 절망이 주는 독설과 원망의 아리아를 부르지 않는다. 아니 부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나옴은 왜일까? 이런 소망에 대해 무지 때문이고 하늘 소망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망적 현실에서 우리가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성경은 바울의 입을 빌어 이 땅에서 소망으로 살아야 함을 다음과 같이 축약하여 선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2~13) 우리의 소망은 ‘부활’이다. 바울은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선언하였다. 이 땅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삶, 그 영원에서 살 수 있는 신령한 몸,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소위 이 부활 신앙이 있는 한 우리는 힘들고 때론 암담한 현실에서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이생의 현실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고난과 수고를 감수함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사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들이고 불쌍한 인생들이다. 이생이 끝인데 왜 참고 살아야 하나? 왜 당해주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내 몫을 찾고 지키며 싸워 이겨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의 몸으로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는 이들에게 현실과 이 육신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다. 부활 소망이 확고하지 못하면 이것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니 천국이 막연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은 너무도 멀리 있는 존재, 아니 어쩌면 없는 존재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는 현실에 하나님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사단도 함께 하고 있다. 사단, 또는 마귀라 하는 존재는 만만치 않다. 우리를 소망에서 희망으로 끌어내리고 마침내는 절망으로 몰아가려 한다.
3. 분명한 케리그마
그러니 그런 마귀에게 노출되지 않고 부활 소망을 확고하게 붙들기 위해서는 기독교 케리그마가 선명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1~4) 바울의 이 선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확실하고 명료한 기독교의 케리그마이다. 복음은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것까지를 말한다.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복음의 핵심이다. 죄에 대한 대속으로 예수가 죽고 우리의 의를 위해 예수가 살아났다.
우리는 내 죄의 대속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나의 의를 위해 살아난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을 잘 두지 않고 있는 듯하다.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그 예수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도 잘 살자는 것, 그것이 복음이 되어버렸기에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해지는 경향들이 있다. 오늘의 교회들, 예배들이 속물이 되어감도 이런 부활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의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예배의 성공주의와 번영의 미학 등도 이런 부활 신앙이 실종된 결과물들이다. 예수의 부활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 제사가 완전한 제사였음이 인정하는 사건이었다. 이울러 그 완전한 제사로 그 안에 연합된 우리가 그 모습으로 다시 창조됨을 공포한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서이고 공인증서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0~22)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켜 첫 열매라 하였다. 첫 열매는 제사 용어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여러 종류의 절기들을 지켜야 했다. 그중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가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이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구원을 담고 있고 맥추절은 약속의 땅에서 추수될 우리의 종말론적 상태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수장절은 풍성한 기업으로 받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교회를 담았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는 예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결론
그러니 예수가 온 이후에는 모든 절기 준수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 중 유월절 사흘 후를 첫 이삭 드리는 날로 지키게 했는데그날에 이스라엘이 그 해 최초로 거둔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려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들에게 허락된 모든 이삭과 열매들이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였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풀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에 어린양으로 온 예수가 그 유월절에 죽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부활했는데 그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 맥추절이었다. 예수가 첫 열매로 드려졌다는 말은 그로 대표하는 열매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 예수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 많은 열매의 대표로 예수가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이 부활이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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