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3. 16:0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시100:1~5)
어느 무명 시인의 고백처럼 모든 문제와 상황들을 주인 하나님께 맡기는 삶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는 어떤가? 내 경험과 내 지식, 신념으로 스스로 내 사태 해결에 나서지는 않는가? 솔직히 내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후자 쪽이 훨씬 더 많고 또 그쪽으로 더 끌리지 않은가?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제 기도를 잘 듣고 도와 달라’며 수시로 목자 하나님을 불러대는 우리들 아니었던가? 내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금식으로 목자 하나님께 협박하지는 않았던가?
1. 양의 신분
신자라 하는 우리는 그렇게 예수의 당부를 잊는다. 그리고 양의 신분을 망각한 채 삶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할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왜 나는 늘 부족한가?’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양에게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늑대는 어떨까? 일주일 정도 풀만 있는 푸른 초장에 감금하면 어떻게 될까? 호랑이는 또 어떨까? 한 열흘 쯤 쉴만한 물가에서 쉬게 하면 호랑이가 만족할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양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의 신분을 벗어나지 말라고 권고한 것이다. 힘 빼고 더 겸손하라는 것, 더 숙이라는 것, 그렇게 이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내가 이기면 하나님이 세상에게 지는 것이고 내가 지면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양들은 목자인 예수의 말을 듣는다. 그 목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라고 하면 따지지 않고 들어간다. 왜? 양들은 주인인 목자가 자기들에게 해 될 일을 하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기본 관계이다. 그렇게 양들은 주인의 말을 따라 그 주인이 먼저 살아낸 어린양의 삶으로 인도된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계14:4)
우리의 주인인 어린양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이리들에게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목자 하나님이 이끄는 곳으로 믿고 열심히 좇아가면 된다. 그러니 종이 주인보다 낫지 못하다는 예수의 말은 타당하다. 종은 반드시 주인의 길을 좇기 때문이다. 동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양의 시력은 –10 정도라 한다. 그러니 그런 양이 자기 비전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이 보여야 비전을 가질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양이, 그것도 죽임 당한 십자가 양이 야망이라니 말이 되는가? 이미 죽은 자가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겠다고 어떤 야망을 가질 수 있으랴? 아니다. 양은 자기 앞에 있는 목자만 보면 된다. 아니, 그 목자만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생은 먹이를 확인하고 그 먹이에게 돌진하는 독수리나 이리일 뿐이다.
2. 독수리와 이리
그럼에도 목자에게 이끌리는 양들이 무슨 소원이 그리 많고 무슨 비전들이 그리 많은가? 기도하여 구하는 것마다 이루어 달라고, 틀림없이 성공시켜 달라고 아우성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0~21) 이 글에서 느껴지는 바처럼 바울은 이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것이 주인을 좇는 종의 자세이고 목자를 따르는 양이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것이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는 삶이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다.
‘나’를 내세우던 내 옛 자아는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이제 ‘나’는 없다.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나’를 살고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다만 아직 오염으로 남아있는 옛 자아의 흔적이 우리를 기고만장하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느니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느니 등, 다 좋은 말이다. 멋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신조차도 그런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느니 항변들을 하니 의기양양인 것이다.
아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때 내 주장, 내 계획과 소원, 내 야망도 죽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나의 주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구원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다. 내 인생 내 책임으로 살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이 사망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로 나를, 내 인생을, 내 사는 이유를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당신이 정한 목적지로 나를 이끌어 간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도 불사하게 되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신분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에 나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다. 우리는 죽음조차도 자신을 위해 죽으면 안 되는 신분이다.
3. 그 담담함으로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죽여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21:17~19)
하나님을 섬기던 종들인데 좀 우아하고 멋지게, 고상하고 고고하게 죽으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죽으면 하나님 체면도 서고 보는 이들에게도 신앙적 다짐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마치 유명한 고승의 다비식 후에 사라를 찾아 공개하는 사찰의 승려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인간적 바람들일뿐이다. 어떤 경우에는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죽는 성도들, 모양 빠지게 생을 마치는 성직자들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 목사 조나단 에드워드는 천연두 예방 주사를 잘못 맞고 죽었다. 공사판 현장에서,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에서, 수학여행차 여객선 타고 떠났던 바다 한가운데서, 축제를 즐기자고 찾아갔던 거리에서 황망하게 죽은 이들 등,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없었을까?
심지어는 코털을 뽑다가 파상풍에 걸려 죽은 목사도 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모른다. 그저 주인 하나님의 뜻임을 믿을 뿐이다. 내 삶에 그런 일이 닥친 들 우리는 이끌려 갈 뿐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주라 부르면서 여전히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세상 성공을 추구하고 무사태평을 기도하며 산다면 그 인생들은 신자가 아니다. 아니 예수의 원수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18~20)
결론
오늘의 나는 예수의 원수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충실한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주’가 아니다. 예수가 ‘주’이다. 그러니 이제 그 찬탈한 ‘주’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혹시라도 이 말이 불편하다면 주인 예수의 이 경고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7~29)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만 악에서 (2) | 2025.04.10 |
---|---|
부끄럽지 않은 소망 (1) | 2025.03.23 |
이 백성들이 사는 법 (0) | 2025.03.12 |
주인을 위하여 (0) | 2025.03.09 |
왜 굳이 독생자 예수인가? (0) | 202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