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성들이 사는 법

2025. 3. 12. 15:4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1~4) 

 

작금의 시국 상황이 마음의 원대로, 아니 기도하여 구하는대로 전개되지 않아 적잖이 심란하다. 다 된 줄 알았고 그래서 마음 놓았더니 역시 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 언제 상황이 우리 것이었던 적이 있던가? 역사도, 인생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왜 자꾸 잊을까?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값을 주고 샀기에 그가 시키는 종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 바울의 이 말처럼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들이지 그 하나님을 불러 나를 섬겨달라고 할 존재가 아니었다.

 

1. 주인의 뜻

그렇다면 종으로서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분별하고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니 말씀을 연구하여 배워야 한다. 그만큼 말씀 공부가 중요하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고는 믿음을 이해할 수 없고 곤란함에 처한 오늘의 우리 처지를 수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주라 부르는 종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천명한 곳이 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마10:16) 예수는 세상으로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전대나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빼앗았다. 즉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 힘을 의지하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들을 양이라 칭하고 세상을 가리켜 이리라 칭함이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그다음에 나온 말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짐승들도 많은데 왜 하필 ‘뱀'을 지목했고 또 그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했을까? 뱀이 지혜로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가 무엇이었나? 인간에게서 에덴을 상실케 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여 뱀이 인간에게서 에덴을 잃게 만들었던가? 인간이 있어야 할 제 자리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나게 하였다. 그러니까 뱀의 지혜는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케 하는 지혜였다. 창조자의 피조물인 인간, 주인의 종들을 부추겨 그 주인의 자리를 넘보게 만들어 버린 뱀, 그런 그 뱀의 지혜가 제자들에게 요구되고 있음이 아이러니하다.

 

세상의 힘을 빼앗기고 무장 해제된 양의 모습으로 이리들의 세상으로 파송되는 제자들, 그런 그들에게 요구된 뱀의 지혜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제자들이 양의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세상의 이리들이 이를 드러내고 그들을 공격할 것이 자명한데 그때 양의 자리를 이탈하여 늑대나 승냥이로 변신하여 응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그다음 말들이 하늘 백성 된 이들의 삶이었다.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10:17~20)

 

2.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양의 모습으로 이리의 세상에 파송되어 있는 주의 종들이다. 당연히 이리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을 공격할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다니지 못해서 인자가 올 것이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만족스럽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했겠느냐?“ (마10:21~25)

 

그때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호랑이의 힘이나 사자의 힘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을 공격하여 그들을 초토화시킴이 아니다. 그들의 무릎을 꿇림으로써 승자의 포효를 지르는 방식의 승리도 아니다. 세상의 공격들이 무의미하게 작용하는 어떤 무리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세상이 예수를 공격하여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작용은 무기력함이었다. 이리인 세상이 기대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갑자기 호랑이가 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즉각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분노를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세상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상의 공격에 메시아가 어린양처럼 죽었다. 이는 세상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세상의 공격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하늘 백성들의 승리 방식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 힘의 원리를 비웃는다. ‘힘으로 모든 것이 될 줄 알았니? 힘으로 공격하면 내 백성이 힘으로 응전할 줄 알았니?’ 세상 힘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고 의미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요 그 백성들인 우리의 승리 방식이다. 기독교인은 세상 힘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며 보잘것없음을 드러내는 인생들이다. 그럼에도 세상 공격에 무너져 무가치를 가치로 여기고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다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래서 교회 예배에 와서도, 기도하면서도, 심지어 마음에 드는 말씀만 골라 읽으면서 ‘돈 주세요, 문제 해결해 주세요, 병 고쳐 주세요, 이기게 해 주세요’를 주문하고 종용하는 이들 많다. 기독교인이 현실 문제에 함몰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면목 없게 만드는 것임에도 말이다.

 

3. 하늘 시민으로 살기

그런 형편없는 기도나 요구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 백성도 어쩔 수 없구나. 세상 공격에 하루를 못 버티니 내가 졌다.’ 이렇게 응답할까? 아니다. 그럴 리 없고 또 그럴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이런 시련과 저런 고통으로 우리 힘을 뺀다. 그리하여 양처럼 지게끔 만든다. 이리가 문다고 늑대로 변신하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살았는데 그 종들인 우리가 어찌 늑대로 살 수 있겠는가? 종이 진짜 종이라면 자기 상전의 삶을 존경하며 그대로 답습하여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가 ‘종이 상전 같으면 그것으로 족하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임 당하는 어린양의 삶이 자유한 삶이요 풍성한 삶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참으로 평안함 주는 다윗의 시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 삶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이 시는 정말 그의 삶이 평안해서 나온 시였을까? 작고 보잘것없었던 체격, 기름부음을 받은 후부터 10년 넘는 기간의 도피 생활, 심지어 블레셋으로까지 도망하여 미친 척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처지였었다. 그가 왕이 되고 나서는 평안해졌을까? 딸의 강간, 아내들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백주 대낮 왕궁에서 겁탈당했던 일, 밧세바를 취한 것과 그녀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 간통으로 얻은 첫 아이의 죽음,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게 쫓겨 맨발로 도망하던 일, 그 반란군 아들의 죽음 등,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한가다윗은 자기 약함이 드러나자 신앙적 자세를 보였다.

 

그래서 이리 같은 현실 삶을 살면서, 이리같은 세상 공격에서 양처럼 쫓길 때에도 양으로 있을 수 있었다. 10년을 넘게 자신을 죽이려 거머리처럼 쫓아다니던 이리 같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늑대나 호랑이로 변신하여 사울을 물어뜯지 않았다. 단지 양으로 남았고 그 이리를 피해 도망 다녔을 뿐이다. 밧세바와 간통하고 아끼던 장군까지 교살한 자기 추악함과 연약함이 드러났을 때, 그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 앞에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원래 이 모양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시51) 그의 눈에는 문제나 사건이 아니라 자기를 이끄는 목자 하나님만 보였기 때문이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나 사건 너머에서 지키고 보호하는 ‘주’가 함께 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많았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이끌고 있는 목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목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았다. 그러니 그 과정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가장 좋은 것으로 결론 날 것을 알았기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비결이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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