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3. 20:3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된 이들이 한 둘이 아닐 터인데 왜 성경은 그 예수를 굳이 독생자라 하는가? 왜 믿음의 선배들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고백을 해 왔고 오늘의 우리 또한 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가? 예수 외의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은 언약적 아들, 혹은 천상적 존재로서의 아들들이다. 다른 많은 아들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수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의 부자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 아들 예수의 유일성과 독특성과 구별됨을 보여주는 말이 ‘독생자’, 즉 ‘모노게네스’이다.
1. 하나님이 아들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이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출4:22~23)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호11:1) 하나님 당신의 언약에서 아들로 삼은 자들, 즉 이스라엘로 모형 된 교회를 아들이라 불렀다. 언약적 아들이니 우리의 아들 됨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니 우리는 적자가 아니라 양자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5) 적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래서 그를 ‘외아들’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 적자의 은혜로 양자 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가운데 왕으로 임직 한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 이들도 있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왕 될 이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7:14) 시편 2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했었다. 또 천상의 존재들을 지칭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1:6) 이런 표현들이 상징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아우르는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선택된 이들을 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왕으로 온 천상적 존재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예수의 표현에서 우리는 현실과 영원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여기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노게네스’ 즉 ‘독생한’ 분이다. 그도 하나님인 것이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여기 쓰인 동사가 현재분사이니 전에도 그 품에 있었고 지금도 그 품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 품에 있을 하나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아들로 낳으셨다’는 이 표현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대체로 사람의 출산과정처럼 이해하려 했기에 무리한 해석들이 나왔다. 초대 교부 오리겐의 ‘유출설’, 아리우스의 ‘피조설’로 등, 그러나 모두 곡해였고 오해였다. 오리겐의 유출설은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예수 출생을 이해한 것이다. 물이 물통에 차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처럼, 충만한 하나님의 흘러넘친 이가 예수라는 것이다.
2. 사전적 이해를 넘어
온 우주가 하나님 존재의 유출로 기인한 것인데 그중에 먼저 유출이 된 것이 예수라는 것이고 나머지 우주는 차례대로 유출되어 존재하게 되었다는 오리겐의 유출설은 예수를 반신반인으로 보았으니 오류이다. 그러면 아리우스의 피조설은 어떤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이라 했다. 다만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창조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고 보았으니 이 또한 곡해이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진 아들이라는 말을 국어사전 개념으로 이해하여 한 것이기에 위험하다. 이런 용어들은 단지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 즉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존재로 탄생하게 될 것인지, 또는 그 아들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설정일 뿐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맏아들 예수가 아버지인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인지를 암시해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특징은 한 피가 흐르고 닮았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존재론적 유사성을 갖고 많은 생래적 특성들을 공유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이런 우리의 경험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시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요 어느 시기에 예수라는 아들이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본질이 같은 분임에 초점을 둔 개념이 ‘낳았다’이다. 육신의 아버지가 육신의 아들을 낳았을 때 많은 생래적 특징들을 공유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는 본질과 성품과 능력이 하나같이 동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인간 세상에서의 경험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들을 우열이나 서열 개념으로 보려 한다. 아버지이니 더 높고 아들이니 조금 못하다는 개념, 그러나 성경에서의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의 낳음 개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합’이다. 지금도 히브리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개념이 있다. 고대에는 더 강했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기록한 성경에 그 같은 표현들이 많다. 특히 성경의 첫 수신자였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를 설명하는 히브리서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려 한 흔적들이 많다. 혹 모계사회에 먼저 성경을 주었다면 하나님과 예수는 어머니와 딸로 비유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는 국어사전의 개념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3. 두 아비들
그런데 성경은 그 외아들 예수를 ‘맏아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예수를 맏아들이라고 부름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그 아래 동생들을 맏아들처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3~15) 우리는 세상에서 내 소원과 비전을 이루는 목적자로 사는 자들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회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전에는 마귀를 아비로 착각하며 살았었다.
그래서 그 마귀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하며 살았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8:44) 예수의 이 말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이 아니다.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예수를 알지 못하던 우리의 옛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요 지금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잔재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신자임에도 마음에는 항상 두 아비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 하나가 마귀의 음성이고 다른 하나가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세상 권세 잡은 자가 제시하는 방법을 좇아 살았었다.
강함이 진리이고 약함은 저주이라는 마귀에게 추동되어 그런 삶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 신념 하여 노심초사하며 살아왔다. 신앙이란 내 마음을 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돈, 건강, 소원에 더 둔다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빼앗는 그 대상들을 제거해 나가니 이를 신앙생활이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을 아버지로 불러 줄 그날을 기다린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8-9) 때로 내 눈을 뽑고 손을 잘라버림은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던가?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먹거리로 다투는 신세가 되었다. 이 비유는 세상이 돼지들의 천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학벌, 직업, 교양, 재산 등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돼지는 무엇을 입혀도 돼지일 뿐이다. 교도소에서는 무기수들이나 장기수들이 양복 재단사를 교도소 면회실로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는 재단사에게서 죄수복을 맞춰 입는다고 한다.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이다. 그들에게는 그 안의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 속에서나마 멋지게 치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 잠시 있다가 갈 단기수들은 죄수복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빨리 세상에 나가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에 죄수복 의상 따위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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