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섭리를 믿기에

2025. 1. 19. 22:17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2:12~14)

 

독일의 사회과학자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합리성과 시민 정신을 결여한 우리의 낡은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이다’ 베버는 자신들을 천민으로 비하하면서까지 제도권에 기생해 온 유럽의 유대인들을 비판했다. 오직 돈벌이에만 매달려서 저신들의 열등감을 씻으려 했던 무리들을 향해 그런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자기라는 숭배에 빠진 인간들, 그 죄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경제 제도이니 그 결국은 천민자본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베버의 분석이었다. 베바 시대뿐이겠는가?지금도 물질적 가치관을 중시하고 정신적 가치관을 경시하는 금전만능주의는 여전하다. 게다가 이 만연함에 기독교라는 교회 집단도 천민자본주의화 되어가는 듯하니 착잡하기만 하다.

 

1. 천박한 사고

우선 ‘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개념을 정확히 알고는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민'을 '천박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 반상의 구별이 있었을 때의 그 '상놈' 개념으로 알고 있고 혹은 오늘날도 여전한 인도 사회 카스트 제도에 있는 불가촉천민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으로 볼 때, 진짜 '천민'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세속 힘만 믿고 추구하여 사는 자들이다. 소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사용해 온 천할 ‘천(賤)’자는 돈을 상징하는 ‘조개 패(貝)’와 ‘창(戈)’ 두 개가 겹친 글자이다. ‘창(戈)’ 두 개가 겹쳐 쌓일 ‘전(戔)’에 조개 '패(貝)’ 붙은 천(賤)의 본래 의미는 '값싸다, 신분이 낮다’였다. 전쟁이 끝나면 쓸모가 없어진 것이 창들이었다. 그런 것을 쌓아놓고 팔아봤자 제값 못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런 의미가 생겨나 ‘값이 싼, 신분이 낮은’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전(戔)은 '남은 것'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에 ‘천(賤)’자는 '돈(貝)밖에 남은(戔) 것이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 천민은 ‘가진 것이 돈밖에 없다’는 인생들, 그것으로 세상의 힘을 쌓는 유일한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이들을 총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왜 세상 사람들은 온통 그런 천민들이 되고 싶어 하는가? 이는 ‘돈=행복, 명예=기쁨, 인기=만족’이라는 현실 세상이 짜놓은 등가 공식, 즉 마귀의 거짓 공식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도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했고 기쁨과 안식, 거기에다가 행복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그 언급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또는 '내 안에 있는’ 등의 수식 어구가 첨가된 약속이었다. 예수가 주겠다고 약속한 평화와 기쁨, 그리고 안식과 행복은 현실이 주는 평안, 세속적인 기쁨이나 행복, 안식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이 땅의 사람들은 하늘 평안과 기쁨, 그리고 그 하늘 행복과 안식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기쁨을 주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 부자로 만들어 주면 당연히 기쁨이 따라올 터인데 하나님은 왜 일을 어렵게 하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을 주려 하지만 사람들은 명예를 달라고, 성공을 달라고 부르짖고 금식으로 협박까지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명예를 얻고 성공을 이루면 평안과 행복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세상의 힘을 얻고 성공을 이루어낸 이들이 만족하며 살던가? 여전히 불안해하고 무엇인가에 갈급해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세속의 힘으로는 인간 가슴에 뚫려있는 허무함과 부족함을 채울 수가 없다. 하나님이 빠진 자리의 공허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는 메울 수가 없는 것이다. 

 

2. 정말 만족한가?

그럼에도 예배당을 출입하는 이들조차도 하나님이 주겠다는 하늘 기쁨과 종교적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직 현실의 기쁨과 행복과 편안함을 위해 부자 되게 해 달라고,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달라고 조른다. 그것만 해 주면 행복과 기쁨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왜 수 천억 원의 재산가가 자살을 하고 잘 나가던 인기인들이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들을 할까? 그런 일들이 일어남은 세속 것들로는 온전한 기쁨이나 행복이 충족될 수 없음을 반증해 준다. 기독교인이라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현실 상황이나 처지와 상관없이 하늘 소망과 믿음에 의한 지금의 행복과 여기의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우리 삶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으로 가는 잠시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의 백성으로서 하늘 천(天), 백성 민(民), 즉 천민(天民)이다. 그런 우리를 사탄은 돈밖에 모르는 천민(賤民)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갖가지 속임과 궤계로 우리 삶을 미혹하고 흔든다. 결국 그 미혹과 속임에 넘어간 이들이 적지 않다. 흔들려서 낙오된 이들이 많다. 현실에서 너무도 많다. ‘성공과 이김이 행복의 근본이라 믿고 신앙생활을 해온 내게 고난이 웬 말인가?’ 하나님이 진짜 행복과 기쁨을 주고자 잠시 허락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세상 힘의 원리라는 안경을 쓰고 볼 때 그것은 실패자의 삶이요 저주받은 인생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것이 마귀의 속임수이다. 그럼에도 사탄과 그 하수인들이 만든 거짓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현실 풍토에서 진행되는 신앙생활 또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현실 개입을 간절한 원하는 기도를 하게 되고 전지전능한 해결사로서 하나님의 신속한 해법을 마치 마땅하다는 듯이 촉구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식의 기도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느린 하나님 믿기’를 연습해야 하고 또 그것에 익숙해져 가야 한다. 한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루하루 걸어가는 여정 전체를 즐기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자기 뜻과 야망을 성취하는 것에만 착념하여 기도한다면 정작 누려야 하고 또 누릴 수 있는 오늘 여기서의 하늘의 것들을 상실한 채 살게 될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이들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달래는 설교로 비위를 맞추고 있는 현실의 강단들이다. 

 

3. 느린 하나님 믿기

사실 현실 교회강단의 설교들 상당수가 거인 문화와 맘모니즘, 소유 지향적 세태와 성공주의를 추동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청중의 비위를 맞추는 그런 선포는 하늘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속물 가나안주의 일뿐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 건물을 넓히고 신도 숫자를 키워봤자 결국 빈껍데기일 뿐임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늘 백성들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시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우리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을 목적지로 삼아 여기서 부와 명성과 성공을 쌓으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약속의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에 연연치 않으며 무병장수라는 축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은 항상 하늘을 향하여 지금도 작동되고 있다.

 

이신론자들이나 자연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달리 해석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 저 먼 곳 어디에서 손 놓고 있기에 이제는 우리의 성숙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 관여하여 일하고 계신다. 창조 당시와 동일한 능력으로 이 세상 역사의 과정,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관여해 왔고 지금도 관여하고 계신다. 역사과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이 개입을 섭리라 부른다. 그러니까 섭리는 하나님 당신이 창조한 피조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창조 관계인 것이다. 그 섭리적 측면에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 과학의 발전, 문명의 진보,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나는 하나님 창조 사역의 열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속에는 창조는 믿되 섭리는 믿지 않는 경향들이 내제해 있다. 종교에 대한 필요는 인정하나 그 적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오늘 내 앞의 현안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음을 믿지 않으니 소위 실천적 무신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속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을 상기시킨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가 너의 아버지다’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의지적 관여, 즉 섭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섭리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는 범신론의 영향 때문이리라. 만유재신론이라고도 불리는 범신론은 언뜻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성경이 말하는 바의 섭리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결론

기독교 신학과 범신론은 물과 기름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상당수 철학이나 인문주의자들은 이런 신론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과정이라는 것, 즉 하나님도 성숙해 가고 있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정하는 위험한 사유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당신의 섭리를 여기서 이루어 가고 있음도 믿는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40:27~31)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번째 성전으로  (1) 2025.02.04
오직 당신의 뜻대로  (1) 2025.02.02
전능자를 믿기에  (0) 2025.01.17
2025년의 새 인류  (1) 2025.01.09
시간 위에서  (1) 202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