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4. 20:4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창25:7~11)
상당수의 예배당 출입자들, 즉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김의 대상으로 여긴다. 하나님께 내가 잘해야 복을 받고 또 막힌 현안들도 풀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나와 연합된 관점으로 본다. 예수를 나와 동떨어진 존재, 즉 타자로 보는 관점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기고 예수를 타자로 신앙하는 경향들이 다분하다.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성경의 잘못된 해석, 그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성경 읽기와 설교들이 만든 오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술이부작 (述而不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진리를 말하되 네 말로 창작하지 말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들을 귀’ 없는 이들에게 진리,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말해 줄 수 방법이 없다. 또 성경대로 말해준들 감흥이 별로다. 대체로 청중들은 그보다는 자기 삶이나 처지에 관련된 설교에 감동하고 은혜받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자기 인격 함양, 자기라는 가치의 의미, 자기 인격의 성숙과 변화 같은 주제들로 설교해 주기를 원한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고 또 믿을만한 실체들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진리를 전해야 하는 설교자들이 그런 청중들의 요구에 맞는 창작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점차 사람들이 자기 듣고 싶은 말을 개발하여 설교하고 또 대중은 자기가 듣고자 엉뚱한 스승을 찾는 경향으로 흘러간다. 그 결과, 재미있는 예화, 이슈가 될 만한 사건들, 감동적인 간증, 등으로 마침내 청중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만한 선동적 설교까지 등장하였다. 솔직히 진리와는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로 그들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창작적 열심에 감동하고 은혜(?)도 받는다. 이런저런 성공 스토리에 눈물을 훔치며 결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감동, 박수, 결단 등이 진리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것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에도 얼마든지 있다.
불교 설법도 잘 들으면 두 주먹 불끈 쥐게 하는 결단을 가져온다.‘착하게 살고 세상에 눈 두지 말자’며 이미 유림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 이외에 다른 말들에 관심이 없어진다. 뉴스나 도덕책, 교양 영화 같은 종류의 이야기에는 흥미가 사라진다. 설교 시간에 그런 잡다한 세상 이야기 듣는 것이 못내 아쉽고 심하면 불쾌해진다. 그러니 설교, 즉 진리인 하나님과 예수를 중신으로 설교하면 듣는 이들이 대략 두 부류로 갈린다. 그 예수 이야기조차도 저가 가치 향상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해 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가감 없이 성경에 있는 날것 그대로 설교해 주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2. 세 번째 성전으로
성경을 바탕으로 같은 설교를 하는데 듣는 이들에게서 왜 두 부류로 나뉠까? 한쪽은 아직도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 즉 ‘너의 상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쪽은 이미 예수와 일체 되어 삶 자체가 작은 예수로 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중요한 사안이다. 얼마나 중요한가? 신자로서 사활을 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예배당을 출입하는 내가 종교인으로 머무는가? 아니면 세인트, 즉 성도로 변화는가? 그 정도의 중요 사안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셨다. 바울도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우리’라는 말은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이 모두 ‘나’이어야 한다. 나 외의 타인도 ‘나’로 여길 수 있어야 ‘우리’가 된다.
그러니 예수를 지금도 ‘너’의 자리에 두고 있다면 아직 예수와 연합한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집요하게 우리와 예수를 함께 묶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그가 살아났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살아났다’는 것, 우리는 살아났다. 첫 부활에도 그렇게 참여하였다. 무엇으로 살아났나? 예수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산 자가 되었다’ 함은 생명을 얻었다 함인데 하늘 생명은 요1:4에서 오직 ‘예수 안에만 있다’고 하였다. 그 안에만 생명이 있고 그 밖은 다 사망, 즉 죽음, 멸망, 영벌이라는 말이다. 그 생명을 공유하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적 지체들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살아났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니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우리에게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했던 일들을 삶으로 하게 된다는 뜻이요 내 인생과 처신이 진리가 되어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이니 이는 단순한 전도나 선교 그 이상의 더 깊고 어마어마한 의미이다. 이렇게 예수와 연합되어 새로운 ‘나’가 된 상태를 ‘세 번째 성전’이라 한다. ‘너희들이 이 성전을 헐라’ 이는 예수의 육체를 말하는 바, 두 번째 성전이었다. 그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세 번째라는 뜻) 다시 성전으로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3. 예수로 살기
대적에 의해 헐리는 것, 즉 예수 죽음, 그 사흘 후에 다시 세워지는 그 성전, 그것이 예수와 연합된 우리들이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와 내가 ‘나와 너’로 존재치 않는다.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누림의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너의 자리'에 놓고 섬김 대상으로 삼는 행태가 여전한 오늘날이다. 그러니 십자가도 나와는 상관없는 2000년 전 예수가 진 십자가일 뿐이고 교회에서는 절기적 장치로 예수의 고난 주간까지 설정하여 힘들게들 보내기도 한다. 그것이 내 일이 아니기에, 저 밖에 어떤 존재가 한 일이기에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들을 귀 없고 볼 눈 없는 이들에게는 거기가 자기 죽음 자리였음을 알려 않고 믿으려 하도 않는다.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수만의 십자가이지 저가 십자가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십자가는 슬프고 무서운 것일 뿐이다. ‘십자가’로 번역된 원어 ‘스타우로스’는 ‘기둥(언약)’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창세전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기획물이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예수를 죽였다. 그 기획 안에 우리도 들어있었다. 이는 죄의 제물로서 내가 그렇게 죽어야 생명이 오는 것을 하나님이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예수가 하나님이었다. 세상에 와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고 죽었다. 이 예수를 단지 고대 인물로 여겨 성경을 읽으면 오해와 오역만 난무할 뿐이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니 구약의 예언, 신약의 복음이 나와 상관이 없는 책이요 기록물일 뿐이다.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 예수에 관한 책이니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성경을 ‘생명책’이라 함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 삶과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 예수 이야기’이면 나는 천국과 관계없는 존재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전체를 ‘나’라는 1인칭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의 사건과 인물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이며 교회의 이야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옛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살려내는 힘이 있다. ‘이전 것을 죽이고 새로운 나로 살아남’이 ‘부활’이다. 죽음과 부활은 따로 시차를 두고 차례로 일어남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죽음이 곧 부활이다. 죽는 즉시로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죽음은 그 처음 자리로의 회귀이자 모든 것이 없는 죽음의 상태이니 거기서 창조가 일어난다.
결론
그럼에도 왜 오늘의 사람들은 죽기를 거부하는가? 종교 생활로 경건한 척하나 죽지를 않으니 하나님의 창조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이다. 죽음은 무덤 안에서 잠자고 기다림이 아니다. 죽으면 즉시로 산다. 그러니 우리의 무덤은 곧 천국문이다. 예수가 무덤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천사들이 있었다. 천국이 무덤 입구에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께 끌려 다니다 결국 무덤 하나 자기 소유로 만들고 죽었다. 고작 그런 것이 인간 삶이고 인생 여정이라면 허무하고 가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온 그는 천국문으로 들어갔다. 소위 세 번째 성전으로 부활한 우리들 역시 그렇게 죽을 것이고 또 그렇게 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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