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이라고

2024. 12. 16. 21:2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90:1~4)

 

 

최근 며칠 사이에 별일을 다 겪었다. 일생에 한두 번 정도 경험해 볼만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경악, 공포, 분노, 탄식, 반전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속된 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이었다. 대체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한다. 세상을 경영하는 창조자의 섭리 안에서 이 시국의 의미들을 해석하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의 창조, 또는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물질주의자, 또는 유물론자들이다. 이런 이들은 보이는 물질이 전부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관념이거나 상상일 뿐이라 한다. 일어난 현상들은 단지 힘의 대결이고 그 결과이며 또 그 작용의 부산물로 전개될 것이라 본다.

 

1. 각자의 하나님들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우리는 어떤가? 물질 이전, 시간 이전, 태초 전의 존재자를 믿는다. 그 존재가 물질을 창조하였고 또 그것을 당신의 뜻에 따라 이용하는 분임을 믿는다. 시간과 만물은 하나님이 잠시 사용하는 것들이지 그 자체는 가치가 없다고 신앙한다. 유물론자들은 이와 반대이다.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질을 그분의 필요에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 영원하다고 보지 않는다. 게다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지금의 물질세계만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 지금을 넘어오는 세상까지 바라본다.

 

범신론자들이 있다. 창조를 믿지 않기에 물질과 인간물질과 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신이 만물 안에 존재하니 그 만물 하나하나가 신이고 영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만물은 만물이지 하나님과 만물은 하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신론자들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수행과 고행에 몰두하고 정진하기에 애쓴다. 인간의 불가능성이나 한계, 인간이 신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창조자를 부인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연주의자들도 있다. 초월적 존재나 초월적 영역을 믿지 않고 만물은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것, , , 별 등이 순전히 자연의 법칙, 중력적 작용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중에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니 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고 그 목적도 인간이라는 것, 혹여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신 역시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존엄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미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는 것, 태양도 신이요 달도 신이며 별도 신이고 산도 신이며 심지어 큰 바위나 오래된 나무까지 신이 깃들었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으 계시인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과 역사의 목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선포하고 있다.

 

2. 신을 담은 인생들

성경은 그 시작에서부터 선포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가 있어서 천지와 만물, 시간을 창조했다고 말이다. 그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있는 것들로, 오늘 여기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까지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주와 천지와 나를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가? 왜 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월을 살게 하는가? 오래전 신실한 선각자도 같은 고민과 질문을 했었다. 이런 이에게 하나님이 준 깨달음은 의외로 담백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사60:21) 왕족이었던 선각자 이사야의 나라와 백성의 위기에 대한 항의성 질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현대 철학은 존재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그 고유의 성질로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라 하였다. 1010분 전의 꽃과 10분 후의 꽃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만물을 이루는 분자나 원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에 존재는 그 고유의 성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 형태는 계속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현대 철학의 이 정의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단서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이나 그 본질에서는 고정적이지만 당신이라는 존재가 담고 있는 내용을 발산하여 우리 삶에 그 영광을 투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러한 본체적 영광을 발산함에 있어 그 영광이 현시된 것이 피조물의 창조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 나타내기를 기뻐하기에 그 창조물인 만물을 관찰하노라면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그 성품과 속성, 그 영광을 현시함에 피조된 물질이 필요했다. 그 영광을 그대로 담지하여 존재케 된 것이 피조물이었고 우리들이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창조물 안에는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그 하나님의 영광 드러냄을 목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하나님은 이런 삶을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는다.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생으로 이끌어 간다.

 

3. 기다리고 설득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시간을 출발시켰고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온전한 세상이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를 성경 속 사건들로 계시해 왔다. 낙원의 아담, 출애굽 사건, 광야의 시련, 가나안 정착과 죄성 등, 가시적인 이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완성을 향하여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고 하늘 양식으로 사는 그곳은 얼마나 행복한 곳일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산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개념 없이 노래하는 삶이 아니다. 죄성을 털어내고 신의 성품과 인격에 참여해서 하늘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어떤 곳이겠는가? 새 창조가 완성된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이고 천국이다. 처음 인간은 지혜를 가진 존재였었다. 그 지혜는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었을 정도였다. 고대에서 이름은 곧 그 존재 내용이었기에 작명은 곧 그 정체를 정확히 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첫 인간은 지혜로웠고 결점이 없는 상태로 지음 받았으니 그 아담은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교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아담을 가리켜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었다. 오실 자는 그리스도였고 후에 온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 이전까지는 나만을 위해 살았던 삶에서 이후 나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들을 천국 백성이라 부른다.

 

그런 삶은 하나님 일방의 강압에 의함이 아니다. 내 인격과 이성에서 자발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일한다. 인생이라는 시간으로 기다리며 사건과 사고를 경험시켜 설득해 나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죄로 오염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깊이를 알게 함으로써 자발적인 순종과 당신 의존적 삶으로 이끈다. 탁한 삶으로 인한 추함과 악함, 그로 인한 고통들을 겪어왔기에 하나님께 의존하고 나를 맡겨 그분의 성품으로 살려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창조에서 타락으로, 타락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렇게 만물을 창조하고 역사에서 인간들을 가시적으로 이끌어 가며 보여주는 이유가 우리를 설득하여 복종케 하기 위함이요 자발적인 순종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결론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다. 무인격적 원리나 규칙도 아니다. 몽상가들의 담론에 등장하는 허구적 존재는 더욱 아니다. 스스로 충분한 분이요 홀로 존재하였던 분으로서 누구의 섬김도 필요 없는 완전한 분이다. 그런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렇듯 창조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는가? 단지 당신의 기쁜 뜻과 사랑 때문이다. 결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믿어준다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불러서 오늘을 맡기는가? 오직 믿음,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우리의 양육과 성숙에 필요하기에 오늘의 사건과 역사를 경험케 하는 것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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