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림의 비유

2024. 9. 22. 14:18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13:1~9)

 

성경에는 비유가 많다. 그중 복음서의 예수 비유는 십자가와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 전문 서점에 가보면 예수의 비유를 강해한 책과 논문들이 차고 넘친다. 대체로 판에 박힌 도덕강해로 해석해 놓은 책들이다. 심지어 어떤 해석은 교인들에 대한 회유나 협박 용도로 강해 된 책들도 있다. 이런 해석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깨끗한 삶, 또는 종교적 처세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예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잘 알려진 비유이지만 대부분의 결론들이 한결같다. 열심히. 노력하여 자갈밭을 갈아엎자, 그래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좋은 밭이 되자는 것, 그렇게 세상의 이치, 현실의 인과율로 해석하니 진짜 메시지인 하나님의 구원을 놓치고 있다.

 

1. 인간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아담 이후로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10~18) 그렇다. 바로 이 모습이 길가 밭, 돌짝밭, 가시떨기의 모습이니 열매가 불가능한 상태인 우리들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과 무기력한 밭에 생명의 씨가 떨어졌다는 것, 그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그 씨가 돌과 가시떨기를 깨고 찢어 올라와 그 밭이 옥토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영원 전에 준비된 하늘의 씨가 원수의 밭에 심겨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 구원을 설명한 비유가 씨 뿌리는 자 이야기이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그 씨 이야기가 창3:15에부터 ‘, 자손, 후손의 이름으로 반복되어 성경에 등장한다. 그리고 바올은 갈라디아서에서 그 씨가 바로 예수라고 확인하여 이렇게 말했다‘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그러니 씨 뿌리는 자 비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불가능의 밭에 예수라는 씨가 떨어져 새 창조라는 열매로 완성되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이 비유는 결코 좋은 밭, 멋진 인생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비유는 불가능한 인생들에게 메시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였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막4:13)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인데 이 쉬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담긴 그 예수와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엉뚱하게 도덕 강해나 윤리교훈으로 오해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2. 왜 이런 비유를

이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려면 문맥상의 배경을 살펴야 한다. 그 배경은 공관복음에 공히 살펴볼 수 있다. 마가의 병행 구절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골육이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나오고 마태에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골육이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 비유는 누가 예수의 진짜 가족이냐?’는 대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배경으로 살펴볼 것은 이 비유 장면이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히 큰 무리가 예수를 찾았다는 현장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적을 본 큰 무리가 그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거기서 이 비유를 설파했다. 그리고 이 비유의 진의를 제자들에게만 설명해 주었다.

 

왜 비유로 말하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해 주었다.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3~15) 이 말은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 이사야서 6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의 그 부분을 찾아서 읽어 본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8~13)

 

3. 여전히 심란한 오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그 웃시아의 사촌이었던 이사야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네가 나를 위해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훗날에 그 임무를 예수가 와서 맡아서 예언자 이사야는 그 예수의 모형적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절망만이 아니었다. 그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뜨이게 되는 날이 오고 황폐해졌던 그 성읍들이 회복되는 날이 온다는 희망도 함께 주었다. 거룩한 씨가 올 때에 성읍이 회복이 되고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뚫린다는 것, 그 거룩한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 속으로 거룩한 씨가 왔다. 그럼에도 왜 그 거룩한 씨의 말씀을 당시 인간들이 알아듣지 못했을까?

 

예수의 출현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 부름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런 이들의 눈과 귀만 열리는 것이니 곧 교회이고 그 교회의 모형이었던 열두 사도가 그 비유를 알아들었다. 그러니 예배당에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해도 모두가 다 하늘 백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서슬이 퍼렇던 유대교의 전힁 당시에도 예수를 좇겠다는 큰 무리가 모였었다.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큰 손해를 감수하여 예수께 나온 인생들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런 인생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하였다. 이는 그 현장에 모인 상당수의 인생들이 구원과 관계없는 가짜들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그 때 뿐이겠는가? 오늘날이라고 다르겠는가? 솔직히 똑같지 않은가?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 중에 정말 하늘 비밀을 아는 사람, 이 비유를 제대로 깨닫고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자기 불편을 해소하고자, 사는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앉아있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인생들에게 예수는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 단호하게 말했다. 오직 당신이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눈과 귀를 열어놓은 당신의 택한 사람들, 그런 이들만이 당신의 가족이요 진짜 하늘 백성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부터 약속된, 아니 영원 전부터 약속된 그 거룩한 씨, 그것이 은혜로 들기 전까지 세상 인간은 모두 돌밭이요 길가 밭이며 가시떨기 밭이다. 구약에서 가시떨기와 돌밭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 상태를 뜻했고 광야 상태를 가리켰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3:17~18)

 

결론

아담이 오염되자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는데 그 저주 산물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였다. 그 저주로 세상이 내놓는 소산물이 과학, 문명, 번영, 재화 등이었는데 그것이 가시덤불이었고 엉겅퀴였다. 세상의 힘들이라는 것들이 실은 하나님 저주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밖에 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의 인생들은 그런 금과 힘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마치 하염없이 동냥 그릇만 바라보고 있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불과한 이 땅의 소사물들을 더 달라고 외치고 부르짖으며 기도한다. 그런 힘에 대한 갈망은 뽑아버려야 할 가시덤불이지 우리 밭에 채워야 할 것들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서 오래전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의 심란했던 심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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