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

2024. 10. 6. 14:06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1:11~13)

 

어떤 사실을 증명하여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로 인정하는 과학적 방법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 첫 단계가 알고자 하는 사안의 <관찰>이고 두 번째는 그 관찰한 현상의 원인을 알아보려는 <의문>의 단계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는 문제 제기의 단계인 것이다. 세 번째는 그 의문에 관한 <추리>로서 가정의 단계이다. 과학이란 것도 결국에는 의문과 추리, 가정에서 출발한다. 네 번째는 그 가정을 <이론화> 하는 단계이고 다섯 번째가 그 이론적 가정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의 단계이다. 그렇게 같은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게 되면 그 이론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으로 인정된다.

 

1. 범주의 오류

그러니 어떤 것이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의 단계까지 통과를 해야 한다. 그런데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네 번째 단계, 즉 이론화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다섯 번째 단계인 실험의 단계로는 넘어갈 수가 없다. 진화론에 따르면 진화는 수백만 년에서 수십억 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하니 그 진화론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수백 만 년, 혹은 수십 억 년을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가능한가? 인간의 제약상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은 창조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을 관측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그 이론이 사실임을 증명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과학적 방법인 다섯 단계를 모두 통과해서 사실과 법칙으로 인정된 것들이 있다.

 

그 법칙을 근거로 하면 왜 황당한 창조론을 따르고 믿는가를 이해할 수 있. 먼저 과학적으로 증명된 '생명발생설'에 대한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보면 그 극명한 차이를 보게 된다. 진화론은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 전제 아래,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무수한 실험을 해 왔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실험과 연구에서도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겼다는 보고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태리의 레디, 프랑스의 파스퇴르 같은 학자에 의해 생명체는 반드시 그 생물의 모체에서만 생겨난다는 사실만이 실험으로 입증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은 그런 실험에 의해 생물의 자연 발생설이 틀렸음을 입증했고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는 생물발생설을 과학의 상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은 자체 내에서 모순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으로는 진화론을 지지하면서 생명의 발생에 대해서는 자연발생설이 아닌,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생명발생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에 존재하던 무기물질이 어떤 화학작용에 의해서 아미노산이 되었고 그 아미노산이 생명체를 이루는 단백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미노산이 단백질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아미노산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되어야 한다. 20종류의 아미노산 500개 이상이 규칙과 순서적으로 일정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단백질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아미노산이 적당히 접힌 채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 복잡한 단백질 2800종이 모여서 겨우 만들 수 있는 것이 대장균과 같은 단세포 박테리아이다.

 

2. 확률 없는 가설과 주장

이는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전제임이 확실하다. 고도의 지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아미노산을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을 하지 않는 한, 아미노산이 저절로 단백질이 될 수 있는 확률은 1020,000승분의 1이라 한다. 보통 수학에서 1050승분의 1 이하의 확률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임이 정설이다. 그러니 1020,000승 분의 1이라는 확률은 발생 가능성 제로라는 말이다. 그렇다. 생명은 우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기에 현대과학은 생명의 우연 발생설을 주장치 못한다. 또한 생물의 재생산 체계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정교한 창조물이다. 유전물질인 DNA도 뉴클레오티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도 어떤 고도의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우연히 생겨날 수 없다. 일정한 순서와 연결, 배열, 그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질서 있는 단백질과 DNA가 함께 있어야만 생명 현상이 유지된다.. 이것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러한 생명 현상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이는 생명이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지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과학에 의해 증명된 생명 발생설이 현대 과학이 실험 증명한 법칙이라면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은 모두 선대에 존재했던 생명으로부터 나왔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그 최초의 생명은 어디서 생겼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였다. 아울러 <열역학의 법칙>에 의해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열역학은 반응에 관한 에너지의 양과 형태 변화, 운동과 열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열역학 제1의 법칙이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다는 법칙인 것이다. 즉 에너지의 형태는 변할 수 있지만 그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불변하다는 말이다. 나무가 불에 타면 연기와 재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탈 때 발생하는 에너지로 바뀌는 것뿐이다. 그러니 연기와 재에다 그 나무가 탈 때 사라진 에너지를 다시 더하여 어떤 조작을 한다면 다시 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그러니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하면 물질 자체가 곧 에너지이다. 그런데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고 다세포 생물이 어류가 되고 어류가 양서류가 되는 식의 진화론은 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된다. 어떤 물질이 커지고 진화한다 함은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無)에서 창조된 만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3.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그래서 물질이 생길 때는 외부의 어떤 힘이 개입되었고 또 그 물질이 창조될 때에도 외부의 강력한 에너지가 투입이 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 하나님의 힘이 에너지, 즉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또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창조론이다. <열역학 제 2의 법칙>도 진화론의 모순을 증명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그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열역학  제 2법칙이다. 돌아가는 팽이를 계속해서 돌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팽이채라는 운동 에너지가 계속 공급이 되어야 한다. 팽이에서 팽이채를 떼는 순간 팽이는 운동에너지를 마찰에너지로 바꾸게 되고 점점 낮은 운동에너지 상태가 되다가 결국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 즉 누운 상태가 된다.

 

과학실험을 통해 증명된 이 법칙은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들이 모여서 특별한 구조를 갖는 물질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질서도가 높은 상태에서 세월이 흘러 늙거나 죽어서 부패되면 그것들은 원자나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주위에 무질서한 상태로 흩어진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성경은 그 상태를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표현하였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르면, 물질은 자연적으로 놔두면 스스로 질서 있게 정렬을 하거나 스스로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진행되고 무질서한 상태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간단한 것들이 점점 복잡하고 질서 있는 것으로 바뀌어 진화를 한다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 위배되는 이론이다. 그러니 진화론은 과학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허점을 갖고 있는 ‘가설’일 뿐이다.

 

물론 창조론도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자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진화론자들에게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러한 불합리한 점들이나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에 대하여서는 믿는다. 아니 하나님의 뜻으로 믿아진다. 우주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적 시간관과 역사관은 직선적이다. 창조로 시작이 되었으니 언젠가 반드시 끝이 나게 될 역사로 시간을 보는 것이다. 시작한 이가 언젠가 끝을 낸다는 것을 믿는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작은 시계 하나가 조립되어 완성될 때에도 시계 조립공이라는 외부의 힘, 에너지가 부품을 가지고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조립해야 시계라는 것이 탄생된다. , 시계의 부품들이 자생적이고 우발적으로 생겨났다 하더라도 어떤 지적 존재가 그것을 질서와 순서에 따라 조립해야 시간을 재는 시계가 될 수 있다. 밖으로부터의 에너지를 부어 넣지 않으면 시계는 저절로 시계가 될 수 없다.

 

결론

하물며 생명체의 탄생이 저절로, 그것도 우발적으로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창조론이 옳음은 진화론 자체의 모순으로도 증명된다. 오늘의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 있는 새 창조를 완성할 것도 믿는가? 혼돈과 공허 즉, 아무것도 없음에서 모든 피조물을 만들어 낸 하나님이니 도저히 불가능한 어둠뿐이었던 내 삶에 들어와 나를 새 창조물로 완성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혹의 삶에서  (2) 2024.10.20
오늘 우리의 용서  (2) 2024.10.13
돼지와 진주  (2) 2024.09.29
씨 뿌림의 비유  (8) 2024.09.22
고향을 찾는 인생들  (4) 202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