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9. 22:1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7:1~6)
인간이 걱정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함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부터였다. 포도나무인 창조자에게 젖붙임을 받은 포도나무 가지들처럼, 자기 스스로의 생명력을 주장할 수 없는 집단이 인간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인간들이 자기들의 개별성을 주장하고 세상 것들로 자기를 보호하고 행복하려 하였다. 그렇게 창조자의 뜻을 거슬러서 사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저주의 감정이 생겨났다. 사는 날들이 염려가 생겨난 것이다. 예수는 삶의 염려로 진리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을 개와 돼지에 비유하여 경고하였다.
1. 그나마 다행히
그런데 그런 인생들 중 일부를 당신의 희생으로 세상에서 건져냈으니 교회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존재와 가치 근거를 포도나무인 하나님에게만 두고 사는 자들로 그 인생이 만들어져 간다. 그렇게 사는 그들 삶에는 염려가 없으니 바로 거기가 하늘나라이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여전히 세상의 지지로 자기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는 인생들이 대다수이다. 자기가 판단의 주체가 되어 도덕/윤리/종교적 열심히 자존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사는 이들은 필연 자기만 못한, 또는 자기 같지 않은 이들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가 염려 다음에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열등감에 의한 것이든 우월감에 의한 것이든 비판과 비난의 바당에는 탁한 아담들의 본성들이 작동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판단을 퍼붓는 현실 세상은 타인을 향한 비판과 비난이 넘쳐난다. 그런데 한 인간, 또는 인간들이 다른 이들을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선하다. 하나님이 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사랑으로의 율법은 하나님 외에 누구도 지켜낼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것을 지켜 존경을 추구하고 그 준수를 근거로 타인을 비판한다. 그렇게 자기의 부족과 추함, 악함을 깨닫지 못한 채 남을 비난함을 성경은 외식이라 한다. 다른 이들의 약점이나 허점을 찾고 비판하느라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우리 눈의 이 들보는 선악과 사건,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할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5~7)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 신처럼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인간의 착각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본다고 하나 보지 못하는 자’, 즉, ‘눈먼 자들이라’ 하였다. 그런 자기 기준으로 타인의 행위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인생들, 율법과 규정을 잘 지키는 삶은 훌륭하다. 세상도 그런 인생을 멋지다고 존경한다.
2. 멋진 삶으로는
그럴게 사는 것은 멋진 삶이다. 과연 박수를 쳐줄만한 인생이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온 자기 기준으로 그렇지 못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비난함이 문제이다. 예수는 그런 인생들을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자들이요 외식하는 자들이라 비유하였다. 그런데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비유로 개와 돼지를 말한 후에 거룩한 것과 진주를 그런 자들에게 주지 말라하였으니 난해한 말이다. 물론 여기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은 복음이요 그것을 전하는 성령을 뜻한다. 개와 돼지들은 받을 수 없는 것을 어떤 이들에게는 구하라 했고 그 구한 것을 반드시 준다고도 하였다. 정말 누구든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얻을 수 있는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주신다’에 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9~13) ‘성령을 구하라. 그러면 줄 것이다’ 한 예수는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하였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를 다음의 말씀과 연결하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17~20)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 했다. 그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
3. 완전케 하는 이
예수만이 모든 율법을 행하였고 완성하여 가르쳤으니 그가 큰 자였다. 계율주의자들처럼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한 인간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의 사건과 사고, 하나님 나라의 의, 그리고 염려와 비판에 대하여 예수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언급하며 ‘그러므로’로 마무리를 지었다. 나열된 모든 명령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요구되었던 것들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그것을 다 지켜낸 이가 예수였고 그 완성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가시켰다. 전가된 그 구체적 삶이 예수로서의 삶이었었다. 그러니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을 들으면 불가능한 인간으로서 다소 마음이 무겁다. 도저히 그 요구를 지켜낼 능력이나 인내심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행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완벽하게 지켜낸 그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가 완전케 한 율법과 선지자이다. 예수는 그 율법과 선지자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함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예수에게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예수의 대접이었다. 그것은 죽음으로 우리를 대접한 예수의 행위였다. 그 예수에게 이제 우리가 내놓아야 할 대접은 그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즉 영접함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1~12) 은혜를 영접함은 나의 행위나 종교적 성과들을 내세우지 않는 것, 즉 자기 부인이다.. 그렇게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대접함이다.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 두고 살았던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자기 부인의 삶, 그것이 십자가로 하늘 백성의 대접을 받은 우리가 예수에게 영접으로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접하고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에 의해 내 눈에 들보를 보고 자각하는 자가 되었으니 소경이 눈을 떤 것이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 진주,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을 인정치 않으려 한다.
결론
은혜를 말하면 자존심 상해하고 복음이라는 진주를 내밀면 그 제공자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전적 비유로 그런 이들을 개나 돼지라 하여 진주를 주지 말라했던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3:17~19)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인간도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이 이것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믿음이라는 하늘의 선물이 없이는 그것을 알 방법이 없고 믿어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모두들 자신이 신이고 왕이 되어 짐승처럼, 돼지차람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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