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0. 22:2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3~16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계절 추석 연휴, 이 시즌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나선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이 맘 때쯤 되면 사람들이 관심은 교통정보에 꽂힌다. 그래서 방송매체가 앞 다투어 실시간 교통상황을 보도하지만 추석이 돼도 고향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길이 뻥뻥 뚫린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그런 점에서 추석에 길이 막히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은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순수에의 동경과 열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 그 교통체증이 답답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1. 오랜만에 천천히
빨리 가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의 의미가 있다. 막히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나만 막히는 것 아니고 다 함께 겪는 일이다. 그러니 차 안에서 가족끼리 함께 들을 만한 음악을 듣고 부족했던 이야기도 나누노라면 그 막히는 길이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막히는 길 위에서도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단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향한 과정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로의 유익한 시간이다. 어차피 추석 연휴는 정해진 것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1년 중 가장 넉넉한 마음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 그래서 추석이 아닐까 싶다.
외국 사는 교포들이 동포들 모임이 있고 헤어질 때면 함께 부르는 노래가 고향의 봄이라 한다.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2세나 3세, 혹은 4세대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회색빛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인데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런 노랫말에 눈물 흘린다고 한다. 그렇다. 고향이란 단지 태어난 곳을 말함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어떤 그리움의 땅인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이라는 것이 무언지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조차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별개의 정서로 자리하고 있다. 고향이란 단지 태어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갈망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귀소본능으로서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로 그리워 하는 곳, 즉 차별 없는 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어떤 이상향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 고향 남쪽 나라,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네’ 이 노랫말을 쓴 분이 무엇을 보고 싶어 했는지도 알 듯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또한 바로 그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믿음의 장이라는 히1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이렇게 시작하는 이 유명한 말씀에서도 고향을 그리워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느끼게 된다. 고귀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그 선진들의 삶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들이 자기들의 전인적 삶을 걸고 추구했던 그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었던가?
2. 이 땅의 손님으로
히브리서 11장에는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 삶이 등장한다. 인류 최초의 피살자 아벨,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에녹, 인류를 구해 낸 노아,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곱, 기자는 그들의 삶을 일별하고 난 후 13절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두를 연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끈 기본 동력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니었고 오직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가? 이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함,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고향을 찾는 삶이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 삶이 어떤 삶이었나? 성경 지식에 탁월한 삶? 종교에 열심히 사는 삶? 그런 말이 아니었다. 진짜 고향을 찾기 위해 기꺼이 이 세상에서 손님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말이다. 믿음의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늘 낯선 손님이며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혹 현존하는 이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지면 이미 믿음의 삶이라 할 수 없다. 믿음의 삶은 이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유목민, 노마드, 나그네, 손님됨이다. 나그네란 떠돌이, 정착하지 못하는, 서툴고 낯선 사람이다. 성경은 일찍부터 믿음과 나그네 됨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삶을 특징으로 말해왔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삶의 큰 특징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것, 즉 나그네 삶이었다는 것이다.
신명기 곳곳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신조>라고 하는 고백문이 많다. 당시로서는 오늘의 사도신경 같은 역할을 했던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문이었다. 그 역사신조의 시작은 ‘우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시작한다. 구약의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낯선 사람인 나그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자기들 시대를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나그네로 이 세상에 와서 살았지만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 고향을 갈망하며 살았다. 이 세상이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끝내 가고자 했던 고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난 온 곳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 그들에게는 고향,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3. 그래서 더욱 본향
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 그들이 세상 나그네로 살면서 끝없이 추구했던 바로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었다. 믿음으로 그들은 그 본향을 그리며 살았다. 오늘의 우리가 꿈꾸는 고향 역시 이 더 좋은 세상으로의 그리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은 바로 이 고향 찾기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세상 질서, 돈과 인기와 이념으로 짜이고 편갈라 지는 세상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그 길을 찾아 나선 삶이 믿음의 삶이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조롱하고 권력으로 인간을 억압하며 피부색과 국경과 이념으로 사람을 나누는 이 현실 세상이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하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서 추석 연휴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어느 사이우리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돈과 권력, 이념으로 잘 짜인 세상 질서, 그것에 너무도 잘 적응하여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가? 믿음의 선조들이 스스로 손님과 나그네,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 신앙,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차별 없고 누구나 존중받는 본향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현실 삶이 어색하고 바보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기에 왕이 인간을 억압하고 강국이 약국을 괴롭히며 죄가 사람을 넘어뜨리는 세상 질서에 대해 '이것은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다른 길이 있다, 하나님 안에 그 길이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 길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나선 믿음의 길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나선 길은 쉽고 편한 길, 넓고 큰길은 아니었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에 그들도 그렇게 살다 간 것이다. 추석을 맞아 밝고 둥근 달빛 아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나라에 대한 꿈이다. 믿음의 삶이란 이 세상에서 참된 고향을 찾는 일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 진짜 고향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삶, 그 세상에 대한 목마름과 그리움으로 우리가 산다.
결론
교회란 이 고향을 찾아 나선 이들의 집단이고 고향 방문단의 다른 이름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믿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사라가 일백 이십 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창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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