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8. 14:5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1:1~3)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다. 그런데 창2:4도 창1:1과 같은 단어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창세기 1장 내용을 창1:1과 창2:4이 샌드위치 빵처럼 싸고 있는 것이다. 두 구절의 원어는 ‘땅’이라는 ‘에레쯔, ’하늘들‘이라는 솨마임,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엘로힘’, ‘창조하다’는 ‘바라’ 등 같은 단어로 구성을 이룬다. 세상의 무수한 문학기법 중 ‘시종일치법’이라는 히브리 문학기법이 있다. 가운데 주제를 두고 그 양쪽에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기법이다. 창세기 1장은 그럼 시종일치법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1. 모두의 안식
하나님 없는 상태는 어떤 상황일까? 혼돈이고 공허함 뿐이다. 그 혼돈과 공허함의 상태, 즉 ‘없음’의 상태에 하나님이 틀을 만들고 내용으로 채웠다. 그것을 첫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 그리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창조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특히 인간 창조는 그 과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멋진 창조 구조가 무너졌다. 그 일로 메시아가 사흘 동안 무덤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셋째 날까지의 창조 구조가 회복되었고 하나님도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었다. 그런데 창조의 일곱째 날에는 매 창조일마다 반복되던 어구가 없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후렴구가 없었던 것이다. 왜 없을까? 이유는 있다. 하나님의 안식, 즉 일곱째 날은 끝없는 영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까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세상적 관점과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본 단견이다. 영원을 시간이라는 역사로 논할 수 있겠는가? 안식에 들어간 하나님은 전능자이다. 그러니 그 안식에 훼손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에 영원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이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안식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엿새 동안의 사역이 너무 고단해서 숙소로 돌아가 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우리 말로 ‘안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솨바트’는 '안식'이라는 우리의 일반 개념을 넘어서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 ‘솨바트’는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다, 자기 자리에 앉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뜰이다. 그러니 피조물을 아우르고 위치시킨 그 하나님 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자리에 있는 것, 또는 마땅히 가야 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위치하는 것이 예배이고 안식이다. 하늘에서는 이미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은 당신이 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예배를 받음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창조자의 순리를 따름에 있다. 즉 우리의 안식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창조자께 예배할 때 주어진다. 내가 주인인 줄로 착각했던 삶을 내려놓음이 행복이고 자기 숭배적 삶에서 깨어나는 것이 안식인 것이다.
2. 지배하고 다스려서
우리는 그러한 안식을 주일의 예배라는 시간과 형식을 통해서 경험한다.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키며 정복하라 하였다.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서 그 정복한 것들을 이끌고 나와 일곱째 날에 순종을 보이는 것,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엿새 동안 열심히 살아서 그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며 정복하면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 물질, 곧 돈이다. 그래서 예배 요소 중에 헌금이 있는 것이다. ‘엿새 동안 말씀을 좇아 열심히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즉 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그 세상을 정복하여 이렇게 결실을 맺었습니다. 여기 제 엿새 동안의 삶이 있습니다. 창조자께서 받으소서’ 이것이 헌금이라는 말이다. 창세기에서 말한 하나님 명령에 대한 내 순종의 삶의 드림이 헌금인 것이다.
그런데 함께 사는 어떤 인간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인 뱀에게 오히려 정복을 당했다. 거기서부터 질서가 깨지고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예배적 관계도 손상을 입었다.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세상 것들에게 오히려 인간이 명령을 받고 산다면 오늘의 우리들 역시 그 인간들의 실패와 그 훼손된 관계에 들어 있는 존재들이다. 세상 힘의 대표인 돈을 다스려야 하는 우리가 그 돈 때문에 예배를 경휼히 여김, 먹고 사니즘 때문에 헌금을 소홀히 함도 그 돈에게 지배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시대에는 그렇게 유흥에게 명령받고 놀이에게 명령받으며 나태에게 명령받는 인생들이 많다. 민물의 영장은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며 정복하여 하나님께 이끌어 예배하게 해야 한다. 그런 안식은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 순간이요 그런 세상 자체가 안식일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은 매 순간이 하늘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런 것을 거룩한 산제사라하고 그것을 한 방편과 모형으로 보여줌이 주일예배이다. 성경은 시작인 창세기에서부터 끝인 요한계시록까지 그 이야기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자 ‘태초’를 시작으로 한 것이다. 결코 시공간의 창조를 시간적 순서를 설명하려고 ‘태초’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창세기에서 지구의 나이가 몇 살인지, 지구가 만들어진 과정이 어떠했는지 이런 고고학적, 역사적, 또는 객관적 정보나 지식을 탐구함에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는 그 창조의 목적과 그 이면 배후에 묵시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즉 천지창조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뜻을 발견하고자 읽어야 한다.
3.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에게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의 1차 수신자는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이었기에 대제국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었던가? 어떤 분이기에 족장들에게 미리 약속을 했고 그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었을까? 대체 어떤 분이었기에 그들을 구했을 뿐 아니라 계명까지 주며 그들의 거룩을 요구했을까? 더구나 이런 요구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타의 다른 민족과는 무엇이 다른가? 창세기는 이런 물음에 친절하게 설명의 동기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400년 동안 거기 살 동안 그 땅의 우상을 섬겨 왔었다. 때문에 여전히 태양과 달과 별, 강과 바다와 뱀들을 섬기는 습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로 그것들을 만든 분으로 확인시켰다.
‘우리 사람들이 섬길 신은 그런 피조물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런 것들은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준 것들이라는 것, 우리 인간이 섬길 신은 오직 한 분,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세상을 무장해제 시키고 나를 구했는가? 어떤 분이기에 이렇듯 태초부터 약속한 것을 나로 믿게 하는가? 어떤 분이기에 우리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 요구하였고 또 그런 삶을 살게 만드는가? 선택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나만, 아니 우리만 구원받게 되었나? 그러니 창세기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만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치상 이해될 수가 없고 이해되지 않으니 믿어지지도 않는다.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해 놓은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택한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나 에녹’같은 ‘산 자들’ 계열의 인물들 나이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그 계열 밖에 있는 ‘죽은 자들’ 즉 가인 후손들 나이는 기록이 없다.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인생들을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 자’들에게만 하나님이 성경, 즉 당신의 말씀을 주었다. 그러니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내용은 ‘산 자’들의 책이지 ‘죽은 자’들의 책이 아니다. 죽은 자들은 말씀이라는 이 성경을 과학이라는 틀로 난도질만 일삼을 뿐이다. 창세기는 창조 과정이 기록된 과학책이 아니요 역사책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니다. 성경은 오직 메시아에 의해 주어질 ‘생명’과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구원의 책이다. 그래서 우리로 메시아 안에서의 생명 회복을 약속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게 한다.
결론
세상은 우연한 것이고 인간은 어쩌다 보니 진화된 것이라 하는 이들은 창조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신앙인들 중에도 창조를 믿는다면서도 실생활은 진화론적 사고에 바탕한 이들이 많다. 진화론은 단지 학설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 깊은 곳곳에서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를 흔들고 있는 아담주의, 유물론, 물질주의들도 진화론의 산물들이다. 진화론은 유물론적 사고를 근간으로 하기에 그런 이들에게는 ‘죄’의 개념이 없다. ‘죄’란 진화되지 못한 ‘미숙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진짜이고 전부라 믿기 때문에 산 날이 기회요 전부이니 여기서 이기고 성공함을 인생 목표로 삼는다. 살아남는 자가 이긴 자이고 이긴 자가 산 자라는 것이 진화론적 삶의 방식이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을 믿으면서 진화론적으로 산다. 그래서 삶의 위기로 치닫는 오늘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정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일까? 정말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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