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 15:1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우리는 통상 서점에 가서 책을 볼 때 우선 지은이를 보고 그다음에 목차를 본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 책의 서론과 결론을 훑어본다. 그런 순서로 읽어보면 그 책의 전체 내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과 분석으로 성경을 읽으면 더욱 은혜가 되고 확신 또한 분명해진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고 서론은 창세기이며 결론은 요한계시록이다. 성경도 서론과 결론을 잘 정리해 두면 그 중간 내용 이해가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1. 먼저 결론부터
그런데 무엇보다 결론인 요한계시록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종말이 구원을 앞서기 때문이고 계시가 역사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종말은 끝을 의미하고 창조는 시작을 의미하는데 끝이 시작을 앞선다니? '시간'이라는 직선적 제한 속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 말은 매우 낯설고 난해한 말이다. 그러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전능자, 영원의 존재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무엇이든지 다 알고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님, 시공간의 제한 없는 그 영원자가 어떤 것을 계획하였다는 것은 이미 그 일은 이루어진 일이다. 계획을 세운 전능자가 시공간 어떤 것을 실행함에는 불가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제한이 없던 창세전, 영원 속에서 구원과 창조를 계획했을 때, 그때 이미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계획하였고 그 목적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세전, 영원 속에서 완성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 창조를, 혹은 구원을 앞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런 하나님은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또 우발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분에게는 목적도 없이 즉흥적으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창세전부터 하나님 심중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려져 있었다면 천지창조는 그 목적지를 향한 첫 삽이었다.
그러니 천지창조 그 자체가 그분의 목적이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의 묵시를 읽을 때 시간 개념을 초원하여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시간은 물질이 존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영원 속에서의 일을 시간이라는 틀로 이해하려 하니 오독이 생기도 해석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인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즉 종말을 먼저 읽고 그 종말이 어떻게 시작되어 그것의 완성점을 향해 가는지를 기록한 서론, 즉 창세기를 읽어야 한다. 이는 결론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서론을 읽어나가는 방식이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요한계시록의 역사와 세상 종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2. 암시와 완성
그러니 계시록을 모르면 창세기를 이해할 수 없고 창세기를 모르면 계시록을 알 수 없다. 창세기와 계시록은 그렇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성경 전체의 관점이다.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의로운 흰옷을 입은 하늘 존재, 아니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 사람으로 창조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가 요한계시록을 암시하고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를 완성하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9~10)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의 강 줄기들과 생명나무 구절이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나?
요한계시록에 강과 생명나무가 등장하니 서론이 결론을 암시하고 계시가 예언을 완성하는 구조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그런데 서론에는 있는데 결론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선악과이다. 빠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론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다시는 시험이 없는 완전한 회복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서론은 결론을 힌트 하고 결론은 서론을 완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론인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이 나오고 결론인 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이 나온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결혼 장면은 어떠한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2:22~25) 그런데 이들의 결혼 이야기가 아무래도 어색하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이 표현 때문이다. 아담에게 부모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인류의 시조요 최초의 인간이 아니었나?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에 갑자기 부모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혼인이 단지 첫 인간들의 결혼에 대한 묘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음을 계시함이다.
3. 서론을 완성하는 결론
창세기의 혼인은 하늘 부모를 떠나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신부인 교회의 혼인을 말한다. 그 교회들과 하나로 연합되는 신랑 예수를 상징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세상 끝 날에 우리와 하나 되는 혼인잔치를 완성하는 그리스도를 암시하였다.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인간 세상의 제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 영광된 연합 관계를 각 자의 인생이라는 역사에서 경험하게 된다. 서론인 창세기에서 신부가 벌거벗고 있었다면 결론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떤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19:7~8)
창세기에서는 벌거벗었던 신부가 요한계시록에서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 역시 서론이 결론을 힌트 하고 결론이 서론을 완성하는 구조이다. 이렇듯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책들이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책명은 ‘베레쉬트’,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태초에’이다. 지금의 ‘창세기’라는 제목은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비릇되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이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고 예수도 그렇게 인용하였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눅24:44) 예수가 모세오경을 ‘모세의 책’이라 말하였으니 저자를 모세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다. 창세기의 저작 연도는 모세가 BC 1500년경 사람이니 아마도 그즈음으로 추측된다.
창세기에는 만물, 인간, 결혼과 가정, 죄와 죽음, 등 모든 개념의 기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기원과 이신칭의,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런 창세기를 읽노라면 바울의 로마서에서 언급한 모든 신학을 경험하게 된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장부터 11장까지, 그리고 12장부터 50장까지이다. 첫 부분은 하나님의 창조, 사탄의 등장과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구원 약속, 그리고 그것의 전개를 내용으로 하는 ‘태초부터 아브라함 직전까지의 인류사’를 나열하였다. 둘째 부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애급 체류 때까지의 역사이다. 이렇듯 창세기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그 중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혼돈과 공허, 흑암뿐인 세상과 삶을 어떤 방법, 어떤 힘으로 회복시켜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
아담과 하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창세기는 이들이 중심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메시아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거나, 또는 예표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 인물 묘사도 전기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관련된 내용만 기록되었다. 아담이 930년을 살았지만 그의 모든 일상은 기록되지는 않았다.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과 개입 사건만 기록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창세기 인물들을 읽을 때 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읽는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읽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다. 경기 결과를 알고 재방송을 즐기는 느긋함, 그 끝을 아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오늘의 내 몫을 묵묵히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미 결론이 정해진 내일을 사는 오늘이 불안할 이유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9~10)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을 찾는 인생들 (4) | 2024.09.20 |
---|---|
이유 있는 창조 (2) | 2024.09.08 |
소금, 그리고 빛 (0) | 2024.08.30 |
반드시, 그리고 속히 (0) | 2024.08.23 |
하늘 사람들이 사는 법 (0) | 2024.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