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그리고 빛

2024. 8. 30. 20:1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3~16)

 

이 비유는 착한 행실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진의와 달리 해석되곤 한다. 이를테면 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 ‘소금을 세상 부패 방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 그러니 세상의 빛이 되자, 부패한 세상의 소금이 되자는 취지로 해석되고 선포되어 왔다. 그런 의미의 선포도 나름 성경 정신에 가깝기는 하지만 정작 성경의 본 뜻은 그런 의미 이상을 품고있다.

 

1. 세상의 미움이 되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날수록 예수는 더 미움받을 것이라 했다.“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그렇다면 성경이 요구하는 성도만이 행할 수 있는 착한 행실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착한이라 쓰인 원어는 칼로스’, 이는 넓고 깊은 을 가리켜 쓰이는 단어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1) 여기 선한이라는 단어가 칼로스이다. 즉 세상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 아니라 예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하여 우리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행실을 말한다.

 

예수의 착한 행실은 세상에서 비움이라는 자기 부인과 하나님께의 순종으로 나타났다. 곧 십자가의 삶이었으니 그것이 소금과 빛의 삶이었다. 바로 그런 삶에서 이 세상에 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렇게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져 가는 신앙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함이 소금과 빛으로의 삶이다. 예수의 착한 행실이 우리에게서 그대로 재현된다면 그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빛이 되어라'거나 '소금이 되어라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 하였다. 그 소금과 빛은 당연히 세상에서 그 역할을 하게 될 터, 그것이 착한 행실이고 그 착한 행실에 의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일하는 성령의 일, 새 창조를 이루어 간다.

 

성경에서 소금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해 왔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대하13:5) 하나님의 백성은 소금 언약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왔다. 그런데 성경 속의 모든 언약들 뿌리는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피의 언약이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9:14~16)

 

2. 하나님들 사이의 언약

창세전 하나님 사이의 이 언약은 당사자가 죽어야 효력이 발생하는 언약이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어야 할 자를 구해내는 피의 언약이 소금 언약이었다. 성경 속에서 소금은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 회복의 상징으로 쓰이곤 했다‘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왕하2:19~21)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의미에도 소금이 쓰였다. 특히 이스라엘의 제사 중 소제라는 제사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했다‘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2:13)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이들에게 뿌려져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 소금이었다. 구약의 이 같은 모형을 예수는 당신의 신약시대에 와서 다음과 같은 버전으로 설명하였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2~35) 레위기에서 아론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던 구별된 소금 떡은 하늘의 떡으로 온 예수였다.

 

그 떡을 먹은 사람은 죽은 자에서 산 자로 회복되고 부정함에서 성결함으로 구별된다. 소금, 즉 예수의 비워짐과 수난, 그리고 십자가가 새 창조를 낳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이고 세상에 있는 착한 행실이다. 그런데 그 소금이 하나님 사랑에서 제외된 이들에게 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지옥이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뻬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3~48)

 

3. 그 소금이 곧 빛이라

왜 지옥 이야기에 소금 이야기가 나올까? 하나님의 언약 체결로 인류를 둘로 갈렸다. 은혜의 소금이 발린 자들은 자기 죄가 발각될 때 대신해 제물 된 예수의 피의 언약, 즉 소금 언약을 믿어 그 은혜 뒤로 숨기에 심판을 피할 수 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9:49~50)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존을 추구하는 계율주의와 인간중심주의자들은 은혜를 거부한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의 피와 십자가가 오히려 저주의 소금, 불 소금이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의 이 이야기는 누가 큰 자인지를 다투는 장면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였다. 그런 삶이 지옥 같은 세상의 실체이니 거기에는 불 소금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금 언약 안에 사는 자들은 이기려는 싸움을 지양한다. 이기려고 경쟁하기보다는 화목과 연대를 추구한다. 그래서 불소금 이야기가 화목으로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면 내가 부인되고 진짜 소금인 예수가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소금과 빛이라는 이 비유는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 이야기였다. 자기들 방식으로의 엉뚱한 하늘나라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미 세상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삶을 설명함이 산상수훈 내용이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예수 때문에 욕먹는 자,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 복 받은 천국 백성의 삶이라 하였다. 그렇게 설명한 후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니 그렇게 살라하였다.

 

산상수훈의 내용 그대로의 삶이 소금과 빛의 삶이다. 그러니 결국 도 소금 언약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요한복음은 1장 전체가 그 빛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빛인 예수가 세상에 오니 그제야 세상 전체가 어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요한은 그 하늘빛이 이 땅에 내려온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본다고 하는 자들, 스스로 빛이라 자처하는 자들을 어두움으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어두움이라 하는 자들을 빛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9:39~41)

 

결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 인생들의 실체이다. 세상은 항상 빛을 끄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둠을 감추어왔다. 소금을 짓밟는 방식으로 자기들 부패를 감추어왔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 한 것이다. 그 소금과 빛이 하늘에서는 찬란한 영광을 내겠지만 이 세상에 들어오면 밟히고 꺼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고 산상수훈의 요체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삶으로 이끌어 가신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사4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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