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4. 16:1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자기 자리를 잃은 사람들. 질곡 많은 인생살이에 이루어 놓은 게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 다들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래전 나라 잃고 강대국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심정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거듭되는 전염병 재앙에 사람들의 심장 또한 그러리라. 하기야 악재가 거듭되고 낙담이 너무도 잦으면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사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캄캄한 세상에 길을 제시한 이가 있었다. 예수였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길'이라 하셨다. 그리고 그의 삶은 어딘가에 머무는 삶이 아니었다. 항상 움직이는 삶이었다.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새도 자기 보금자리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였겠는가! 그도 인간인지라 살면서 답답한 지경을 만나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상황을 뚫고 나가셨다.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있으면
삶의 길을 잃어 방황하던 사람들이 벳새다 광야까지 예수를 따라왔다.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에 예수는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살 이유가 있음을, 희망이 있으니 포기 말 것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의 소중한 존재들이라 위로해 주셨다. 그러다 저녁이 되었다. 그들은 굶주렸고 잘 곳조차 마땅치 않았기에 제자들은 해산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 지시의 항당함을 지적하지만 예수는 오병이어의 잔치를 베풀었다. 현실만 보는 제자들의 눈에는 문제 해결책이 없었지만 신의 사랑이신 예수에는 여러 길이 보였던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길이 없는 곳에도 길을 만든다.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였지만 제자들이 풍랑 속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자 그들을 위해 행동하셨다. 성난 물결이 설레는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바다에는 길이 없다. 하지만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은 파도 위에도 길을 내었다. 죄와 죽음의 운명에 매여 사는 우리에게도 그는 생명의 길도 여셨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을 통한 길이었다. 그 큰 사랑이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17-21)
바벨론에 잡혀가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예언자를 통해 새 시대가 열릴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들이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새 백성으로 탄생하게 될 것임을 예언자는 아름다운 비유로 들려주었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내겠노라'라고.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노라.'고. 정념 신의 사랑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림을 예언자는 선포하였다.
그 길을 찾아서
사방이 캄캄한 오늘의 우리 현실, 도무지 길이 었을 것 같은 우리 삶에도 사랑이 있으면 길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랑이 우리 속에 있는 한 낙심은 금물이다. 신은 분명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 목마른 사람들을 살리려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신 분임을 믿는다. 길을 찾으려면 이정표나 지도를 보면 되지만 삶의 길에는 지도가 없다. 인생의 지도는 예수뿐, 우리에게 생명을 내신 그분이 삶의 지도이다. 그러니 길이 보이지 않거든 거친 숨을 조금 가라앉히고 조용히 그분에게 집중하자.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자. 생의 문제를 상의해 보자. 당장 응답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지속해 보자.
산에 웅장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멋지다. 하지만 척박한 곳에서 안간힘을 다해 자라는 나무들도 아름답다. 바위에 길이 막히면 온몸을 비틀어서라도 햇빛을 향해 서 있는 나무들. 화강암 사이의 이런 소나무들은 죄다 동남쪽을 향해 뻗어있다. 햇볕을 향한 그것들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사막의 풀은 세상에서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우연히 사막에 싹을 틔운 그 식물 뿌리가 한 방울의 물을 찾고자 어두운 땅속을 더듬어가니 그 뿌리가 더없이 깊다. 생명은 그처럼 강인한 것이거늘 만물의 영장이는 인간만이 척박한 환경을 탓하고 길 찾기를 포기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 11~12)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있다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길 없는 곳에서도 길을 발견하며 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이요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지속적 열정이다.
서두르지 말고
서두르면 일을 망치기 마련이다. 길을 눈앞에 두고도 사람들이 좌절함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멀기만 한 그 길은 우리가 공들여 걸어야 할 삶이다. 힘들고 암울하여 도무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만 해 보자. 한꺼번에 인생을 다 살아보려니까 안개가 더 자욱해지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디뎌야 할 한 걸음을 정성껏 내딛다 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 가까이 이르게 된다. 그때부터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와도 두렵지 않다. 그러니 오늘, 이번 주 할 수 있는 한가지씩 해나가 보자.
소설 <모모> 속의 청소부 할아버지는 거리를 쓸 때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쓸었다. 한 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숨 한 번 쉬고, 숨 한 번 쉴 때마다 비질을 한 번 했다. 한 걸음, 한 번 숨 쉬고, 한 번 비질. 거리의 청소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말했다. "때로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 더 긴장되고 불안해.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 남은 길은 여전히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남들보다 열 걸음 앞서 가라고 세상은 부추긴다. 그래서 이긴 자를 성공한 사람으로 대접한다. 그러니 모두들 영웅이 되려 하고 엘리트로 추앙을 받으려 하니 세상이 이 모양이다. 사람 사이에 신의 사랑이 실종되면 길이 막혀 버린다. 부디 한 걸음을 잘 내딛자. 혹 길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면 신의 도움을 구하자. 그렇게 예수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노라면 어느사이 우리 스스로가 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라.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라.' 하시는 하늘 소리를 듣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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