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1. 13:0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13)
우리 인간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이는 성경 속 바울의 말이기도 한데 ‘죄의 종’이란 말로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종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부품이다. 그러니 종의 존재와 행위는 모두 그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의 것이다. 인간이 죄의 종이기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설령 좋은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주인 된 죄의 것이다. 그러니 생산하고 축적하여 만족과 행복에 이르려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결국 죄라는 말이다.. 그것이 마귀에게 속했던 우리 인생들의 실체요 사망이며 죽은 상태였다.
1. 항상 깨어 있음
그렇게 죽어 있는 우리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왔다. 와서 자신과 상관없는 십자가를 짐으로서 어떤 선택된 무리들의 사망을 삼켰다. 그렇게 살린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의 사무를 맡기면서 ‘깨어있으라’고 명령한 비유가 그 메시지이다. 그렇게 떠난 주인은 언제 돌아올까? 알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종 된 자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항상 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종들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들은 종이지 주인이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그것은 무리였다. 즉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욕심으로 사는, 즉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이었다는 말이다.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깨어 있어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으라’ 이런 명령은 제한적이기에, 정함이 있기에 얼마든지 인간 능력으로 수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항상 깨어 있으라’는 명령, 무한한 것, 정함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무리이다.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아니 인간은 자야 한다. 그럼에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여행을 떠나면서 주인은 왜 종들에게 깨어 있으라 했을까? 제한적인 육신을 지닌 인간 특성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추측건대그 ‘깨어 있음’의 주체는 아마도 종들이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유사한 비유가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여기에는 집 주인이 어디에 갔다 오는지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바로 혼인축제였다.
2. 하늘 축제
‘깨어 있음’과 ‘혼인축제’가 무슨 연관이 있나? 그 주인이 혼인축제의 주인공이었는지 하객이었는지는 비유이기에 중요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이 다녀온 혼인축제가 완료된 축제, 이미 끝낸 축제였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의 혼인축제는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 이어진다. 그러니 그 축제에 갔던 주인이 일주일 후일지, 한 달 후일지 돌아올 날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주인은 그 축제에 가면서 종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했다. ‘교대로 깨어 있으라’도 아니고 명을 듣는 모든 종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였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막13:37) 주인을 기다리는 모든 자가 깨어 있어야 했다. 그러면 그 ‘깨어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나?
여기 ‘허리에 띠를 두르고 등불을 켜고’라는 어구는 출 12장의 유월절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서 살아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신을 신고 급히 유월절을 먹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등불이라 묘사된 불기둥으로 나섰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허리에 띠를 띠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내야 했다. 그들 복식은 치마 같은 겉옷을 걸쳐 입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허리띠를 찰 때는 급히 어디론가 출발하거나 중요한 일을 할 때였다. 그렇다면 혼인축제로 떠나는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했던 그 명령은 우리의 광야 인생 전체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삶에서 건너가야 할 여정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일러 ‘깨어 있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혼인축제가 완료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종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 주인은 곧 다시 올 예수를 상징한다. 성경은 다시 돌아오는 그 주인의 가시적 귀환을 '재림'이라 부른다. 그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예수의 강해가 이 비유속에 숨어있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 예수가 간 곳이 어디였나? 하늘의 혼인축제였다. 사람들은 통상 어린양의 혼인축제는 멀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완료된 혼인축제에서 돌아온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비유들은 이미 완료된 혼인축제에서 그것을 종결짓기 위해 다시 온다는 것, 이것이 예정이니 이미 영원이라는 영역에서 완료되어 있는 어떤 묵시가 이 세상 역사로 펼쳐지는 것을 우리는 예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3. 깨어 있음의 축제
시간은 인간의 개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통합 개념이다.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개념에서 역사를 보면 에덴동산의 아담 안에 내가 들어가 있고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축제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 역사는 순서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 언약 안에 이미 완료된 것들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양의 혼인축제는 그 영원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미 완료된 축제였다. 예수는 그 혼인축제가 벌어지는 그 나라에서 가시적 역사를 사는 우리에게 온 하나님이었다. 즉 완성된 축제에서 당신 백성들을 찾아왔는데 바로 깨어 있는 우리들이었다. ‘깨어 있음’을 근거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온 그 자리가 ‘깨어 있음’의 자리이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명령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인 삶의 자세이고 상태이다. 구원은 ‘깨어 있음’이라는 행위를 전제로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키로 작정된 자들이 깨어있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혼인축제는 이미 완료된 축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다는 율법과 제사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율법준수라는 성과를 내놓으면’이라는 조건적 주문이 아니었다. 인간을 결코 완벽함을 이루어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 그러니 회생 제물로 내려갈 하늘의 아들을 의지하여 당신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은혜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준 장치들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은 율법과 제사로 완벽하겠다고 수선을 떨었다. 동산에서 실패한 이레, 인간들은 자기 무용함과 한계를 인정치 않으려 해왔었다. 자기 존귀, 자기 가능성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마귀가 율법으로 오해시키고 악용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인생들이 아니라 말한다. 정작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음에도 우리는 은혜의 현실을 경험한 인생들이 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통째로 원수에게 먹힐 때 사단의 입은 이미 그때 찢어진 것이다. 십자가라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신부인 우리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혼인축제가 열리고 있는 완료된 나라, 그 영원에 들어가 있는 신부들이다. 다만 그 혼인축제에 왜 신랑의 피가 필요했는지를 배우는 이 세상의 유학생일 뿐이다
결론
하늘 축제를 기다리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인간의 죄와 악을 낱낱이 들추어져서 수시로 넘어지는 내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경험해야 한다. ‘위대한 생산, 큰 성과로 자기 가치를 올리라’는 마귀의 속삭임이 여전한 현실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개입하여 내세울 것이 없는 상태로 만드니 은혜이다. 그것이 ‘나의 나 됨’에 대한 고백이고 죄 된 나에게 은혜를 구하는 겸손이다. 그렇게 해야 피조물이 피조물 본래 자리로 내려가 앉게 되고 그 결과,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에서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급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12:11~12)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사랑 이야기 (2) | 2024.08.08 |
---|---|
계시를 아십니까? (0) | 2024.07.30 |
사는 날들의 버거움 (3) | 2024.07.14 |
무화과나무가 잎을 내면 (0) | 2024.07.07 |
기도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 (1) | 2024.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