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가 잎을 내면

2024. 7. 7. 17:3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렘42:1~3)

 

 

전래 동화 중에 <해님 달님>이라는 작품이 있다. 떡 장수 어머니가 장사를 마치고 산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호랑이가 나타나 계속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팔다 남은 떡을 다 빼앗아 먹는다. 그렇게 떡을 다 빼앗아먹은 호랑이가 배를 두드리며 갈 길을 갔을까? 아니다. 호랑이는 어머니에게 남은 떡이 없음을 알게 된 순간 그 어머니를 잡아먹었다. 그리고는 어린 남매가 있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 흉내를 내며 그 남매까지 먹으려 했다. 그때 남매는 기도하여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님과 달님이 되었다. 호랑이도 썩은 동아줄을 타고 남매를 잡으러 하늘로 따라 올라가다가 동아줄이 끊어져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그 바람에 수수의 꼭대기가 벌겋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 신앙이 무엇인가?

자기들이 일을 치고서는 그 후한이 두려워서 예레메야 예언자를 찾아와 하나님께 이후의 일을 물어보았던 이스라엘 유력자들, 현제 삶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세상의 마지막 때를 말하는 예수에게 그 마지만 때가 언제 임하는지에만 꽂혀 그때와 그 시를 알고자 했던 제자들, 그런 이들이게 신앙이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그런 천박한 호기심의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해주었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면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시간, 믿음의 감성을 놓치지 말고 오늘, 현재를 진지하게 살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신앙인들 양태는 순전히 지옥에 가기 싫어서 하기 싫은 종교 행위를 억지로 하는 것 같고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하느라, 섬김을 짜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양상들을 보이는 것 같다..

 

기라성 같은 부흥회 목사들이나 영계 거성이라는 신부들은 강대상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협박하며 으렁거리고 무지한 교인들은 앉은자리에서정말요?’ 반응하며 자기 소유와 에너지를 내놓는 모양새, 왠지 사악한 호랑이와 어리석고 불쌍한 떡장수 어머니 이야기가 자꾸 떠오른다. 열심히 떡을 바친다고 사망을 면하는 것도 아니고 지옥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믿음은 내 수중에 호랑이에게 바칠 떡이 없어도 문제가 없다는 당당함, 어떤 이가 내 사망을 이미 삼켜 파기했다는 확신, 떡을 요구하는 지옥의 호랑이가 나을 잡아먹을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 믿음으로 사망을 이기고 지옥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실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가르치고자 때로 내 삶에 내어놓을 떡이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내가 너를 구하고 있다는 당신의 열심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귀는 떡 하나 주면이라는 행위를 조건으로 제시하며 다가온다. 이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이라는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처럼이라는 유혹으로 접근했던 것과 같은 접근이다. 인류 역사 전체의 시간들을 관통하며 마귀는 지금도 우리 인간들을 집요하게 미혹하고 있다. 인간들은 가치 있고 소중하며 능력 있는 존재이니 너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끼라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생산되고 축적된 떡으로 생존을 도모하고 행복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왜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인생을 사느냐고 흔든다. 언제까지 그렇게 끌려가는 미성숙한 삶을 살 것이냐고 근사하게 속삭인다.

 

2. 정말 인간은 소중한가?

너의 떡으로 너희 생존과 행복을 사수하라 멋진 말이고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인간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이들이 그 마귀에게 떡을 바치며 산다. 라는 자기중심의 인생 자리와 그 안위, 그리고 구원을 위해, 아니 더 나아가 그 왕 된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산다. 그래서 마귀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느라 바쁘게들 사는 것이다. 보이는 의 행위와 의 소유가 마치 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신념 하기에마귀가 요구하는 떡을 생산하고 축적하여 세상 신의 제단에 올려놓는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였고 그 양상이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진행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특히 마귀가 띄워준 '나'라는 존재가 정말 그렇게 주인공이어야 할 정도로 소중할까?

 

아니다. 사실, 인간은 마귀가 띄워준 만큼, 아니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존재는 못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여 하나님과 유사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뜻도 아니다. 그 존재가 완전히 비워져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해 채워져야 진짜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존재는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4) 예수가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삶을 살았다. 그것이 하나님 형상의 의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완전한 자기 부인이 전제된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분의 뜻 안에서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13:30~31) 모든 것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만이 끝까지 남아서 다 이룬다는 것, 모두 성취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나 현실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완료된 미래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해야 한다. 모든 현상과 현실은 사라질 것이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만은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난 일들과 현재 현상, 사건 행위들이 쌓여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그 이상을 믿는다.

 

3. 내일이 오늘을 이끌어 

우리는 내일로 오늘을 산다. 결정된 미래가 있고 그 확정된 미래가 현재와 과거로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겪는 현실이 아니라 미래에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고 말씀이다. 그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우리 구원은 재료로 쓰일 뿐이지 진짜 중심은 하나님이다. 그런 면에서 에덴동산에서 가장 소중한 것도 인간아니었다. 에덴동산의 중심과 핵심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였다. 만약에 인간이 그 나무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면 그깟 선악과 과일 하나 먹었다고 그 소중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동산에서 인간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 있는 존재이지 언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언약, 즉 복음을 담고 있는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 나라 원리를 보여주는 모형이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 원리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이 출제한 하늘나라에 대한 통과 시험이었다. 그 시험을 통과할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예수로 와서 그 통과 시험을 풀었다. 그렇게 그 시험문제를 풀어서 우리로  당신의 나라에 들여보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인 예수를 율법의 마침이라 하였고 예언의 완성이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합격자 신분을 우리에게 부여하였으니 그것이 생명나무이다.

 

사람들은 이를 은혜라 하고 사랑이라고도 부르니 그런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나라의 구조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하나님, 그런 하나남의 나라를 증거 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나무 실과, 즉 하늘의 떡을 얻어먹는 인생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선악과 시험을 나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겠다고, 또는 스스로 떡을 생산하여 하늘 자녀답게 살아보겠다는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된다. 내가 선악과 시험을 풀어서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살아남이 아니라 생명나무 실과가 나에게 무상으로 먹여짐, 바로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으로 역사가 시작되었다. 너희는 떡을 만들지 못한다’에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떡을 만들라, 너희는 떡을 만들 수 있다고 마귀는 우리를 채근한다.

 

결론

스스로 떡을 생산하여 떡을 내놓을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인생, 그래서 그런 자기를 스스로 추앙하려는인간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인생들을 죽은 자라고 선언한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1~3)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유혹하는 세상 신에게 붙들려 그 세상이 요구하는 떡을 추구하며 살기에 바쁜 인생들, 그렇게 사망에 속한 자들, 죽은 자들은 세상 신에게 속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바를 행하며 떡을 생산해 낸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삶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고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13:28~32)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제를 기다리며  (1) 2024.07.21
사는 날들의 버거움  (3) 2024.07.14
기도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  (1) 2024.06.30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0) 2024.06.23
그들처럼 우리도  (0)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