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0. 16:0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sl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14~20)
기도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불가능함을 전제한다. 내가 할 수 있고 스스로 풀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기도하지 않을 것이고 또 할 필요도 없다. 노력하고 연구하며 방법을 찾아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그래서 하난미께 더 큰 감사로 살라는 것에 있다. 훗날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다 하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니 이로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다.
1. 과정의 하나님
하나님은 한나에게 사무엘을 줄 때도 그런 과정을 통해 임신하게 하였다. 창세전의 계획상, 하나님은 사무엘을 당신의 종으로 사용해여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부모의 헌신이라는 동참이 있어야 했던 것,.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한나에게 브닌나라는 고약한 동서를 주어 핍박 받게 하고 그녀의 태를 오랫동안 닫아서 당신의 도움만을 구하도록 했다. 그녀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간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한나의 입에서 사무엘을 당신께 바치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얻어냈다. 이런 과정을 거처서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종 사무엘이 이 땅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한나가 경험했던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그런 시련에서 한나의 기도가 촉발되어 그녀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나 자신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는 인생으로 성숙되어 갔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 아들을 바쳤던 헌신의 과정과도 같았다. 그 일이 그녀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기도는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고 그 하나님의 예정에서 하나님이 다 이끌어간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일에 우리로 단지 숫가락 하나 더 얹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를 동역자로 대우해 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막11:23~24)
예수의 이 말씀은 기대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고 했다. 심지어 ‘산에게 명해 바다로 들어가라’ 하면 산이 바다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이들이 이 구절로 기도의 능력, 믿음의 역사를 강조해왔다. 믿음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을 일이 없다고 설교해왔던 것이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후,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산을 바다에 던지려는 시도를 했었음이 교회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어떤 기도원에는 믿음 좋은 사람이 기도하면 굴러서 떨어진다는 흔들바위가 있다. 실제로 그 바위를 굴리기 위해 바위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엄청난 기도를 했었다고도 한다.
2. 산을 옮길만한 기도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지려 했던 심정의 강력한 기도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 부지기수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한 번도 어떤 산이 아침에 일어나니 바다로 빠졌더라는 보고가 없다. 분명 예수는 그 정도의 일이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라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니 그 유사한 일조차도 기록이 없는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0) 그렇다면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소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우리는 어떤가? 내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나의 믿음도 ‘하나님의 믿음’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내게 주어진 믿음을 얼마만큼 내 주관적 믿음으로 발휘해내느냐를 ‘믿음의 분량’이라 한다. 이 분량은 내가 노력하고 학습하고 훈련해서 쌓아가는 일방적 분량이 아니다. 이미 온전한 선물로 들어온 그 믿음을 주관적인 내 믿음으로 나타내는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겨자씨 정도가 아니라 이미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왜 산이 옮겨지지 않는가? 산은커녕 볼펜 한 자루도 옮기지 못하고 살고 있다. 예수가 말씀을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오독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인 예수가 틀린 말을 할리가 없으니 읽는 우리가 오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 여기의 ‘산’은 예수가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인 시온의 산을 가리킨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주변의 산으로는 감람산밖에 없었는데 통상 복음서에서 그 산은 항시 ‘감람산’이라고 명확하게 표기해 왔다. 그러니 이 말씀에서의 ‘이 산’은 고지대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뜻한다. 특히 마태복음의 이 대목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내려오는 길에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이고 난 후에 한 말이었다. 그러니 예수의 이 말씀은 구약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의 파괴를 말한 것이었다. 이는 무너짐, 죽음을 통해 다시 사는 복음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말이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인간의 힘과 지혜로 구원에 이르려 한다. 자기 능력과 지혜로서 세속 행복에 이르려는 모든 시도들이 율법과 성전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러한 인간들의 시도를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행위로 보았다. 그래서 성전을 뒤엎고 무화과나무까지 저주하여 죽이고는 그 나무가 서 있던 시온산으로 비유하여 바다에 던져짐으로 말했던 것이다.
3. 평탄케 하는 삶
예수가 옛성전을 허물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임은 인간들의 자기 힘으로의 구원, 행복에 이르려는 모든 행위를 부인한 사건이었다. 예수는 그런 인간들의 모든 시도를 십자가로서 단번에 부인하였고 인간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이룬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율법의 산이 바다로 던져졌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4~5)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 사역으로 율법의 산인 ‘이 산’, 즉 시온산을 바다로 던졌다.
그 예수가 이제 우리에게도 믿음을 사용하여 율법의 산을 바다로 던지라 한다. 오늘의 언어로 환언하면, 물질만능주의, 능력지상주의, 주술적 신앙주의를 버리라는 말이다. 세속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는 모든 시도들이 율법의 산, 시온산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미 돈, 권력, 성공이라는 그 산을 바다에 던졌다. 그처럼 우리도 기도하여 계율의 산, 욕망의 산을 바다에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말의 진의이다. 우리는 1등을 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이 아니요 이기고 성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인생들이 아니다. 오히려 높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와야 하고 세속의 욕심을 바다에 던져야 하는 인생들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속적 성경 읽기는 사람들에게 산을 오르라고, 꼭대기로 올라가라고 부추긴다. 긍정적 사고로 행복에 이르라 하고 번영을 이루며 기적과 신비의 짜릿함을 경험하라 추동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믿음으로 바다에 던져야 할 욕망의 산이요 시온에 있는 산들이다. 그 산은 이미 예수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으니 우리도 기도하면 바다로 던져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산을 던지라 하고는 다음과 같이 더하여 말하였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 당신이 이미 이룬 모든 것을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이루어가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세상 힘을 빼서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해가는 모양으로 전개된다. 기도의 사람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 하시고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고 또 응답받았다. 하나님의 복이 자기에게 임하여 ‘지경’이라는 ‘하나님 나라’가 자기 삶에서 확장되는 것, 야베스는 그것을 구하여 응답받았다는 것이지 공인중개사 장로님들의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이 그런 야베스를 ‘그 어미가 수고로이 낳은 자’라고 단서를 붙여놓은 이유이다.
결론
예수가 세상에 와서 ‘수고로이 낳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 대한 이야기, 이는 우리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한 야베스의 기도를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열두 제자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고 돌아와서 자랑들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귀신이 나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눈에 보이는 현상 때문에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말이다. 약속으로 사는 우리들이다. 하늘 시민에 어울리는 삶, 그 흔들지지 않는 삶을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듣고 응답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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