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8. 11:3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21~24)
속죄소 밑의 증거궤는 인간의 죄, 그리고 인간의 실패를 담고 있다. 히브리서 9장 내용에 의하면, 모세의 깨진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그 상징들로 들어 있다 한다. 그 증거궤 위로 제물의 피가 뿌려짐은 하나님이 그 피로 속죄를 가름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행위를 보지 않고 대신하는 그 제물의 피만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창조자인 하나님이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 있고 피조물인 우리는 용서받는 자리에서 그분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로 내려앉는 구조이다.
1. 신랑 아담
성경은 그 상태를 하나 됨, 연합, 혼인 등 여러 단어로 표현한다. 성경은 한계적이고 나약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구조를 그렇게 표현해 왔고 또 그렇게 존재한다. 하나님은 아담이라는 신랑을 잠들게 하고 그의 옆구리를 뚫었다. 그리고 심장을 지키고 있는 갈비뼈를 하나 뽑아내더니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든 사람을 아담에게 이끌어오니 아담은 그 사람을 보고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이 고백과 함께 아담은 그녀에게 ‘여자’라 이름을 주었다. 아담이 여자에게 사랑 고백과 함께 이름을 주는 이 장면이 출애굽기에서는 율법의 옷을 입고 다음과 같이 등장하였다.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 하는 일례로 돈을 낼지니라.“ (출22:16~18) 남자와 여자의 신성한 결혼에 돈 이야기가 나온다. 지불해야 하는 돈이 있다는 것이다.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과 결혼 이야기에 왜 돈 이야기가 나올까? 좀 속되지 않은가?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이었다. 그 당시의 모든 고대에는 그랬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여자나 그 가족에게 돈을 내야 했다. 결혼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 그것을 빙폐물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도 ‘함’이라는 것을 지고 여자 집으로 들어가는 유사한 풍습이 우리 한반도에도 남아있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데 그것이 자기 아내가 될 여자의 가치에 상응하는 예물이었다. ‘내가 아내를 이만큼 사랑하고 그녀를 끝까지 책임을 지겠습니다’는 고백의 표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빙폐는 아내의 몸값이라는 돈이기 이전에 신랑의 사랑고백의 표식이었다. 아담은 바로 그 빙폐로 ‘여자’라는 이름을 주었으니 그 이름 안에는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라는 아담의 사랑 고백, 즉 '너는 나이고 나는 곧 너이다'라는 짙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랑과 혼인은 남편의 죽음을 근거로 출발하였다. 남자의 죽음으로서 그 남편과 한 몸 될 여자의 탄생, 그리고 혼인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보다 깊은 사랑을 계시하는 하나의 그림이요 모형이었다.
2.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인 신랑 예수와 그 아들의 신부인 우리 교회와의 혼인잔치, 그 연합이 어떤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이 아담과 하와의 탄생이었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사랑으로 당신 신부와 결혼하여 구원할 것임에 대한 예시였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신부와 혼인을 하고자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 신부가 죽어 있었다. 죄와 허물로 신부의 자격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혼인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때 신랑은 깊은 잠, 즉 죽음에 빠져든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죽은 것이다. 그의 옆구리가 뚫리고 심장을 감싼 갈비뼈가 드러나면서 그 일부가 신부로 살아나는 것이니 그 죽음은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예수의 사랑 고백이었다.
그렇게 하늘을 떠나온 아들과 자격을 상실했던 우리가 한 몸이 된 것이 혼인이고 구원이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산 자’라는 신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암시되어 온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었다. 그런데 신부의 계명 도발로 그 관계가 깨져버렸다.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가 그 남자와 끊어짐,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성경은 그 상태를 행음이라 했으니 그 혼인 파탄에 '우상 섬김'과 '행음' 이야기가 등장하였다. 깨진 사랑, 무너진 신뢰로 인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추했다. 서로를 핑계 대었고 서로에게 책임과 잘못을 전가했으며 심지어 혼인시켜 준 하나님의 책임까지 들먹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원초적인 복음을 준 것이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창3:15) 여자의 후손은 뱀에게 발뒤꿈치를 물려서 피를 흘리는 인생으로 살게 되겠지만 그 피 흘림이 사실은 그 뱀의 머리를 밟는 십자가가 될 것임을 계시한 말이다. 뱀들의 세상은 상대의 피를 빠는 방식으로 산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꺾어야 하는 힘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 자녀들은 내 피와 살을 먹으라고 내주는 방식, 즉 은혜의 원리로 산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는 것 같고 약해 보이겠지만 결국 그것이 상대의 머리를 밟는 승리의 삶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복음 이치를 알아듣고 깨달았다. 그래서 여자에게 다시 이름을 주었다. 빙폐물로 주었던 ‘여자’라는 이름을 폐하고 이제는 ‘하와’ 즉 ‘산 자의 어미’라는 이름을 주었다.
3. 다시 신부로
죄로 죽었던 여자가 신랑에 의해 다시 살게 됨, 즉 새로운 혼인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신랑은 지금 눈앞의 신랑이 아닌 여자의 후손이라는 새 신랑이었다. 새 신랑의 발뒤꿈치가 마귀에게 물려서 죽었던 여자가 살아 그 신랑의 신부가 되는 이야기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그 여자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산 자의 어미’라 함은 그녀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살 것이라는 것, 우리는 바로 그 여자, 즉 ‘산 자의 어미’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도 산 자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 하와, 즉 ‘산 자’들을 위해 잠에 빠져드는 십자가 이야기로 연결된다. 신랑 예수가 자기 목숨을 빙폐물로 지불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가치가 그의 목숨과도 같다는 고백이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신랑 예수의 사랑 고백이고 혼인이며 한 몸 됨이고 연합이다. 그러니 신부인 내가 잘나거나 성대한 잔칫상을 마련하여 신부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 아무 대가도 없이 그저 신부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그 장면에서 혼인잔치가 거행되었던 것이고 그 자리에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한 몸 고백이 선포되었다. 신부는 하나님의 옷으로 덮임을 받는 자였으니 이것이 천국 혼인잔치이다. 하나님은 벌거벗어 부끄럽게 된 우리를 당신 옷으로 덮고 치장시켜 신부로 세웠다. 결코 내가 신부 자격이 있어서 그 혼인 자리에 세운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신부는 피투성이, 죄로 더럽혀진 구차한 처지였고 죽은 자, 사망에 이를 신세였다.
그렇게 죽을 인생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그 죽은 자가 하늘 백성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은혜에는 대가가 있었다. 신랑의 죽음, 피투성이의 자리로 내려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죽음을 통과하여 사랑을 성취한 하나님의 은혜가 신랑이 준비한 예복이었다. 그 예복, 즉 믿음을 입지 않은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지 못한다. 혹 들었다가도 주인에게 쫓겨난다. 그들도 나름 무언가를 입고는 있었다. 그들대로는 훌륭한 옷이었으나 예수의 의라는 예복은 아니었다. 인간의 자기실현, 자아확장이라는 성공적 삶으로는 하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인생들은 신랑에 의해 진행되고 완료되는 천국 잔치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그러기에 잔치에 초청을 받아도 가지 않는다. 왜? 자기 일상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소도 사야 하고 장가도 가야 하며 밭에도 가봐야 하는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기 때문이다.
결론
세상에서는 그런 삶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느라 무료로 초대받은 천국, 영원을 놓치고 산다. 하늘의 떡은 내가 생산하거나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떡을 주는 분이지 떡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3~35) 자기 삶에 착념하느라 정작 하늘 혼인잔치의 초청을 경홀히 여기는 인생들, 이는 천국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열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은혜로 주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니 믿음이 선물이요 은혜인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14)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드시, 그리고 속히 (0) | 2024.08.23 |
---|---|
하늘 사람들이 사는 법 (0) | 2024.08.16 |
계시를 아십니까? (0) | 2024.07.30 |
축제를 기다리며 (1) | 2024.07.21 |
사는 날들의 버거움 (3) | 2024.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