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날들의 버거움

2024. 7. 14. 14:41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2~5)

 

삶의 경험에서 느껴온 바 인생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일 수 있고 고통의 향연’일 수도 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도 인간 고통의 문제는 여전하다. 그래서 현저들은 인간들이 당면해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연구와 해결책들을 제시했으나 인간은 여전히 이 문제를 안고 산다.

 

1. 이 버거움의 근원

어떤 사람들은 인간 고통의 문제가난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믿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우리나라도4~50년 전까지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대체로 부자 동네는 조용하다. 번잡함과 싸움도 별로 없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는 소란스럽다. 싸움도 수시로 많이 일어난다. 돈이 없어 먹을거리도 변변찮은 사람들이 용케 술은 구해서 마시는데 곱게 마시지도 않는다. 술에 취하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가난으로 인한 세상에의 원망과 복수심이 술의 힘을 빌어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분명 가난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가난이 고통의 근원일까?

 

아니다. 가난이 고통의 근원이라면 가난하지 않은 부자는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말인데 정말 부자들은 모두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을 많이 받아 교양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해서 품위와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 아들을 비교해 보면 분명 무지도 고통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지가 인간 고통의 근원일 수는 없다.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면 교육 잘 받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선해야 하는데 정말 현실이 그런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인류가 르네상스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인간은 교육을 잘해도 역시 악하다. 교육이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실제로 오늘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교활하게 들키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전문적인 지식으로 제도나 조직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악하고 교활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혹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정말 마음이 고통스럽다. 그러니 분명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병도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만일 질병이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의 근원이라면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안다. 이렇게 가난, 무지, 질병’같은 것들이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고통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2. 사망의 증상들

가난, 무지, 질병, 그런 것들은 고통의 근원에서 발생하는 증상들이다. 독감에 걸리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하며 몸이 으슬으슬 춥고 뼈마디가 쑤시는 고통이 나타나는 것 같은 증상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 증상을 수반하는 인간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죽음때문이다. 다른 말로 사망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기에 고통의 증상들을 느낀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 (히2:15) 이렇듯 두려워하고 있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은 어떤 병원균에 의해 전해지는가?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기에 인간들이 부지불식간에도 그것을 이렇듯 두려워하는가? 죽음, 그것은 짐승들처럼 단지 숨이 끊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인간의 죽음은 짐승들의 죽음과는 너무도 다른 죽음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짐승들은 흙으로 지어졌다‘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창2:19) 그리고 인간도 흙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다른 것을 불어넣었는데 그것이 생기였다‘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7)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자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단순히 짐승들처럼 숨을 쉬는 존재를 넘어 거기에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갔다. 그러니 인간의 ’생명’은 짐승들처럼 단지 신체의 살아있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 생기로 인한 살아있음이 보태지니 이를 속사람의 생명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영의 생명이라고도 부른다.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이 육체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짐승들의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단지 육체의 숨이 끊어진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로 말미암게 된 영혼의 단절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는 있으나 영혼의 생명이 없는 이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 한다. 이렇게 영혼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사망이라 하고 죽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영혼의 생명이 끊어져 있으니 사실상 걸어 다니는 시체이고 좀비이다. 만물의 영장이었던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 후에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문화 명령종교 명령이었다.

 

3. 선악과 앞의 인생

문화 명령은 창세기 1장에 나온다‘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28) 여기 다스리라라는 원어 라다는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때 쓰는 단어였다. 인간에게 만물을 황제처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이다. 그리고. 종교 명령은 창세기 2장에 나온다‘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창2:15~17)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지만 이 선악과는 먹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하였다. 이것을 종교 명령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이 선악과가 무엇인가? 어떤 의미이기에 하나님이 이렇듯 금하였을까?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즉 만물 중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존재였다. 하지만 더 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그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선악과는 바로 그 사실을 인간에게 확인시키는 상징이요 도구였다. 성경에서의 죄라는 것은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에게 거역함을 라 한다. 하나님이 옳다 하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르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 것선악과아래 놓인 인간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판단자가 되려 했다. 즉 하나님께의 순종을 저버린 사건, 그것이 선악과의 사건이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이 말은 인간들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불순종을 라고 부른다. ‘은 바로 그 의 증상들이다. 그때까지 인간은 무죄한 자였기에 악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이름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 하였다. 아직 악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 나무 실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나무 실과를 따서 먹는 행위, 그 불순종의 행위로 인해 악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결론

선악과는 나의 상위 권위자인 하나님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할 인간의 자기 주재, 실체를 자각시켜 주는 복된 나무였다.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선악과 앞에 설 때마다 이 복을 상기시켰어야 했다. ’나에게는 창조주가 계시다. 그분께 순종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하다.이 은혜를 반추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매사에 하나님 보다 나를 내세우고 선악과를 도발하려는 욕망은 여전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허락한 삶의 기회, 에덴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우선하여 살고 있나? 버거움으로 사는가? 아니면 기회를 준 전능자에 대한 즐거움으로 사는가? 행복과 불행은 바로 여기에서 갈림을 굳이 겪어보고서야 알겠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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