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7. 22:2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3:1~8)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왔다는 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를 의롭다 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이 대속 제물이 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기대에 어긋나면 그 만큼 분노도 큰 법,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대상이었지만 도발로서 그 사랑을 저버렸으니 저주를 받았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까지 저주를 받았다. 큰 사랑에 큰 저주가 따른 것이다.
1. 사랑과 저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18~25) 인간 때문에 자연계도 저주를 받아 모기가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고 거머리가 붙고 기생충이 몸속에 기생하며 독충의 자연이 인간에게 해코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계가 인간과 함께 썩어질 운명의 종노릇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은 자연 피조물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성경은 그것들이 하나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올 때, 즉 우리가 신의 자녀로 완성이 되는 그 시점을 기다린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은혜와 긍휼의 풍성함’이라는 말을 함께 쓴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그 사랑은 언제든지 진노로 변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바울은 구원을 말할 때 사랑에 긍휼과 은혜의 풍성하심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빼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라 해도 문맥상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굳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부연 수식 어구를 썼을까?
사랑이 진노로 넘어갔었는데 어떤 무리에게만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가 적용되어 진노로 넘어갈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으로 구원을 선물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3:8)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절대 진노나 분노로 바뀌지 않는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조변석개하는 사랑, 주었던 사랑까지 회수하고 몽땅 쓸어버릴 것 같은 사랑,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셔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이다. 바울도 바로 그런 풍성하신 은혜를 외쳤던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항상 빠지기 쉬운 딜레마를 안고 있다. ‘정말 나를 구원하셨을까?’ 지금 내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자신이 없다고 여길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서 흔들린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상식과 살아온 관계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다르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한 하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또 공경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란 하나님만이 신이고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차원의 두려움이다. ‘혹 내가 제대로 못해서 버림을 당하면 어떡하나?’ 이런 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다. 그러니 신앙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비례한다.
그 분의 풍성함과 사랑의 깊이를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그분에 대한 믿음, 신뢰도 깊어진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은 자들인지, 그 죄 값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치렀는지,, 하나님이 그 해결책으로 무엇을 하셨는지, 그 해결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바울은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은 사람인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면 알수록 ‘절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가게 된다. 그 풍성한 사랑을 안다면 ‘내가 이러고도 천국 갈 수 있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로 가는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통해서 예수도 확인시켜 주셨다. 돼지사료 열매도 못 주워 먹을 만큼 처참한 지경의 우리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 아버지가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었다. 무엇을 잘했다고 그렇게까지 할까? 탕자의 행위가 아버지의 호의를 산 것 아니었다. 그 탕자가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우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신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은 아버지 품에 와서도 늘 불안하기만 하다. 자신이 아버지께 받은 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니 그 아버지가 선물을 해 줄 때마다 수첩에다 기록한다. 갚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다. 그래서 밥 한 그릇 먹을 때마다 수첩에다 기록한다. 좋은 것을 해 줄수록 더 불안하다.
3,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면 그렇다. 갚아야 한다는 것, 부담되는 것이 더 커진다고 느끼니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일4:16~18) 우리가 아버지를 오해하는 것은 우리 현실의 아버지 상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긍휼과 은혜의 아버지를 설명해도 그런 아버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한계이다.
그래서 혹 내 삶에 일이 잘못되거나 잘 안 풀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생기거나 하면 ‘하나님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벌을 주시는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무지이다.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교훈을 할지언정 화가 나서 벌을 주는 분이 아니다. 구원이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죄에서 건짐 받은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구원은 죄로서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켜 거룩한 자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라는 사건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제로 말해왔다. ‘구원받았다, 구원받고 있다’ 그리고 ‘구원받을 것이다’ 이렇게 삼중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는 완료 표현은 ‘칭의’로, ‘구원을 받고 있다’ 현재는 성화로, 그리고 ‘구원을 받을 것’이란 미래는 영화를 말함이니 구원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죄에서 건짐받은 것만을 구원이라 함은 심히 소극적인 표현이다. 구원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영광된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이 ‘거룩’이다. 이 거룩은 영화 상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구원의 결과이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고 ‘흠이 없다’는 것은 외적인 완전함이다. 우리의 구원 목적은 그렇게 겉과 속이 완전한 거룩함과 흠이 없음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과 한 곳에서 사는 것에 손색없는 자로 우리가 매일매일 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은 어느 정도인가?‘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1:5)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에 그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우리에게 없으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선물하여 당신과의 관계에 어색치 않은 자들로 만든다. 구원 얻은 우리를 반드시 천국으로 데려가기에 하나님이 거룩한 자로 만들어서 데려간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살 수가 없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룰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 죄된 육신을 입고 있기에 그럴 수가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이 육신을 벗고 새 몸을 입을 때에 우리의 성화가 완성될 것이다. 신앙적 삶에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음은 우리가 인간이고 여전히 육신으로 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무너지고 깨지면서 우리의 구원이 거룩으로 완성되어 간다. 지금도 우리는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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