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7. 19:5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창5:21~25)
사람이면 누구나 원할 것이다. 이왕이면 오래 살고 돈도 벌며 승진, 성공하여 잘 먹고 잘 살기를, 한번뿐이 인생이니 그렇게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이다. 그런 것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들이다. 거기다가 죽지도 않으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만이 신앙의 목적이 됨이 위험한 까닭은 그 성취를 위해 남을 해치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뜻으로 살고자 함에 손해 봐야 할 일이 있으면, 또 양보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양보, 그 손해가 별 것 아니라고 여김이 신앙인의 내공이리라. 이미 받은 하늘의 큰 은혜를 생각할 때 그런 것은 큰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1. 좋은 것을 기다리는 삶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1~32)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안 주는 것이 있다. 왜 안 주는가? 당신의 자녀 성숙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주지 않는다. 사랑의 아버지일지라도 그런 것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정작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것, 하나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병 고쳐 달라, 집값이나 오르게 해 달라, 이번 계약 성사시켜 달라. 조르고 또 조르라는 이 세상 교회의 현실, 정말 어디까지 가려는가? 그 무지함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정말 은혜를 받고 그 은혜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그런 기도,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은혜로 사는 이들은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어떤 이상한 목사님은 여기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1일 3000번씩, ‘예수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중얼거리면 정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다. 나름 유명한 목사라는 이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참담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로 인한 교제요 대화이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대화하는 것, 즉 수시로 지성소에 들락거리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몸 자체가 이미 지성소가 되어있으니 우리는 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 기도는 내 생각 한가운데, 즉 지성소에 거하고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이다.
과거 구약 시대에는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자체가 그 지성소가 되었다. 나와 하나님이 연합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우리는 예수로 인해 쉬지 않고 그분과 관계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 나의 삶, 내게 일어나는 일체의 일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알 맞는 자녀로 만드는 과정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 과정에 있는 것이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실패할리 있겠는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그런 분에게 불가능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분의 뜻이고 피하고 싶은 현실들도 뜻이 있어 놔두는 것, 아니 허용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을 시작하셨고 시작한 그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이 데려가는 삶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끔 우리에게 어떤 일을 완성해 놓았으니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명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5:9~10) 이렇게 예수께서 완성해 놓으셨으니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감사와 기쁨은 더 커진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기뻐하고 늘 감사로 넘치는 인생으로 완성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하늘 기쁨을 이 땅에서 조금씩이라도 경험하며 산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빌1:6)
이런 사랑을 아는 자들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자기 인생을 산다. 구원을 이해하고 거듭난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에 육신의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 당장 예수가 다시 오더라도 그 사태를 기꺼이, 아니 반갑게 맞을 수 있는 부끄러움이 없는 지금을 살겠노라는 결심, 그것이 종말론적 삶이다. 이런 다짐이 마음에 없는 인생들은 아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풍성을 경험치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5~26) 우리는 예수로부터 이러한 약속을 말씀, 즉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기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 일례로 든 에녹, 그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라고 성경은 소개한다. 어떻게 그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을까?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간 에녹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구약의 그 옛 시대에서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던 에녹은 믿음으로 산 자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체로 여기고 그 나라와 그분을 소망하며 사는 삶이다. 그런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다.
3.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삶
에녹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어떻게 살았던가? 현대인의 성경으로 소개된 그의 행적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1:14~16)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그의 아들 이름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에녹의 아들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무드셀라’였다. 이 이름의 뜻은 ‘창 던지는 자’라는 뜻도 있지만 ‘이 사람이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고대시대에는 전쟁할 때 각 부족이나 마을에서 창을 가장 잘 던지는 사람이 선두였다. 그 선두에 서서 상대 적장이나 중요 인물들에게 창을 던져 죽이는 것으로 전쟁의 기선을 잡은 것이다. 그러니 고대시대의 전쟁은 창 던지는 자에 의해 그 승패가 좌우되곤 했었다. 만약 그 창던지는 자가 죽으면 그 전쟁은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에 패한 종족에게는 심판이었다. 그래서 ‘무드셀라’라는 이름이 ‘이 사람이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에녹은 어쩌자고 자기 아들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신약의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천사의 고지를 따라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주었다. 또 마리아에게도 천사가 나타나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였고 그 명령대로 이름 지었다. 그처럼, 하나님은 에녹에게도 무드셀라라는 이름을 짓게 했을 듯하다. 그것은 곧 계시를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무드셀라는 아버지 에녹으로부터 '네가 죽는 날 심판이 임한다'는 예고를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살았다.
그런 에녹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았겠는가? 사람은 죽는다. 누구다 다 죽는다. 태어나다가 죽을 수도 있고 넘어져서 죽을 수도 있으며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게다가 유아 사망률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던 고대시대였다. 그러니 에녹은 매일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종말론적 신앙으로 산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자라면 이 땅에다가 무엇을 쌓아두겠는가? 그는 심판을 기다리며 살았고 그 심판이 올 것을 전하며 살았던 인생이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사실 구원받은 하늘 백성들은 에녹처럼 그런 삶을 산다. 구약에 약속되었던 예수가 왔다. 그리고 말씀된 대로 죽고 말씀된 대로 부활하였다. 그리고 가면서 ‘내가 곧 다시 오마’ 하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전의 사건들을 통하여 계시하였고 그 계시한 바를 이루셨던 하나님, 그 약속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결론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777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노아가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25~32) 무드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그리고 노아가 600살 되던 해에 홍수가 임하였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창7:6)
그렇다면 계산해 보라. 187+182=369, 노아가 600살 되던 해에 홍수가 났으니 더하면 969, 무드셀라가 몇 살에 죽었던가? 969세였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성경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예수는 온다. 그리고 세상은 심판받을 것이다. 우리가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맞다면 에녹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불에 타 없어질 이 세상에 성을 쌓는 삶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반드시, 그리고 속히 온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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