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6. 15: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히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6:14~18)
산길을 걷다 보면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들을 보게 된다. 그저 소박한 마음으로 그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더해 보기도 하였다. 소원을 빈 것은 아니었다. 그 돌탑을 미신적이라거나 주술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무엇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약함을 느꼈다. 하기야 무엇이든 자기가 다 할 수 있었다면 굳이 돌탑 같은 것을 쌓으려 하지 않았으리라. 사실 예외 없이 우리 모든 인간들은 누군가의 돕는 손길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철든 사람이라 한다. 그렇게 어느 사이 한 해 끝자락이다. 좋았던 일, 슬펐던 일, 그리고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 이 모든 시간이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가 함께 해왔다는 느낌이 우리는 어른답게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1. 나보다 더 나를 알고
‘내가 당신을 알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군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당신이 먼저 나를 선택해 주셨군요.나의 앞이 아닌, 멀찍이 뒤도 아닌 바로 옆자리, 아니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숨 쉬고 계셨군요.‘ 신심 충만한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고 바라보고 계시디가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성경의 표현인데 어떤 부르심이었나? 왜 우리를 선택하셨나? 어느 카페의 재미있는 글귀를 올린 인터넷 문장이다. '아메리카노 - 싱거운 놈/ 에스프레소 - 독한 놈/ 카푸치노 - 부드러운 놈/ 카페라테 - 고소한 놈/ 마키아토 - 달달한 놈/ 카페모카 - 복잡한 놈.' 다양한 커피 종류에 별명을 붙여 놓은 재치 있는 메뉴 글이었다.
우리 한국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커피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커피 중에서 양도 적고 진한 데다가 써기까지 하여 아무도 안 마실 것 같은 커피가 있다. '독한 놈'이라고 별명 붙은 에스프레소, 정말 이 커피는 아무도 안 마실 것 같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에스프레소가 없는 카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에스프레소가 모든 커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에스프레소에 넉넉하게 뜨거운 물을 부으면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된다. 차가운 물에 얼음 좀 띄우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고 따뜻한 우유를 넣으면 카페라테가 되며 우유 거품을 내고 향가루를 뿌려주면 카푸치노, 캐러멜 시럽을 첨가하면 캐러멜마키아토가 되며 초콜릿 시럽을 첨가하면 카페모카가 된다. 그래서 에스프레소를 일컬어 '커피의 심장'이라고 부른다.
심장, 이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의사들이 사망을 선고할 때 기준되는 것은 심장이라고 한다. 즉 심장이 멈춘 상태를 사망이라고 진단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라는 심장이 멈추면 그 신앙은 죽은 믿음이다. 예수라는 존재가 삶에 아무런 활기나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나사렛 예수, 그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사는 것이 재미없고 그래서 더욱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위기이다. 삶의 허무이고 가치관의 혼돈이며 영적인 위기인 것이다. 그 얘수의 이상, 호흡, 열정이 삶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니 죽은 사체에서는 악취가 날 뿐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고후2:14~15)'
2. 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어떤 냄새인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 단서를 보여주었다. 보통 편지는 좋은 말로 끝내기 마련이기에 바울도 그렇게 좋은 권면의 말씀을 하였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갈6:14) 너무도 멋지고 유명한 구절이다. 그러니 그 정도로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느닷없이 바울이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더하여 던졌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갈6:17)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교회 누군가가 바울을 심하게 괴롭혔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의 권위에 대해 의심하고 폄하했던 것 같은데 그 일로 바울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편지 끝에 불쑥 이런 말을 더했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를 괴롭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바울이 제시한 내용이었다. 그는 '내가 너희보다 더 배운 사람이다'라거나, '내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다'라거나, 또는 '내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다"고 하였다. 예수의 '낙인'은 원어로 '흔적'이라고도 하는 '스티그마'이다. 본래 주인이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자기 재산인 가축의 몸에 찍는 낙인, 그것을 스티그마라 하였다. 여기서는 바울이 예수 때문에 받은 삶의 상처 자국들을 의미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자신이 예수의 정통적 사도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자신의 학식, 재산, 지위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예수로 인해 받은 고난의 세월, 그 과정에서 겪었던 상처 자국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은 박해의 흔적들은 그의 사도 됨의 증거물들이었다.
어느 현자는 ‘흉터를 부끄러워 말라, 아니 흉터가 되라’고 하였다. 어떤 과정을 살아 낸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흉터는 감추고 싶기 마련인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함은 살면서 받은 상처들은 많은 시험과 시련에서도 그가 꺾이지 않았음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그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일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어떤 흉터, 상처 자국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흉터와 상처 자국들은 '내가 나의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에 대한 실체요 증거들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옆구리와 손바닥에도 깊은 '스티그마'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쇠못이 뚫은 상처 자국과 날카로운 창이 옆구리를 뚫은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그 예수의 상처 자국은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오히여 믿음의 도구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 스티그마가 인류를 구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다.
3. 상처 자국에서 나는 향기
나무마다 '옹두리'라 불리는 부분이 있다. 울퉁불퉁하고 단단하여 그 나무의 못 생긴 부분을 이룬다. 그 '옹두리'는 나무가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보기에도 흉하다. 그런데 나무의 가장 깊은 향을 간직한 곳이 그 옹두리라고 한다. 자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거기에서 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나오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쳤던 세 가지 예물 중 하나였던 유향, 그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리말에 ‘옹두리 많은 모과나무가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말도 있지만 정작 열매까지 옹두리 향을 품게 하여 사랑받는 과일로 만들기에 그 상처의 의미는 간과할 수가 없다. 올 한 해를 살면서 내 욕심과 욕망을 채우려다 얻는 상처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하물며 믿음의 길을 걷다 얻는 상처는 나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는 "Christian Dior"가 아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살다가 거기서 받은 상처 자국에서 나는 향기이다. 고산지대 바위틈에 자라는 야생의 백리향, 향이 100리까지 퍼져나간다고 붙은 이름이다. 높은 산 절벽 바위틈에서 자라기에 사람들은 잘 몰랐다. 처음 본 사람들은 단지 수많은 야생 들꽃들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해가 내리쬐는 절벽 바위틈에 뿌리 하여 마치 이끼처럼 납작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엎드려 줄기를 뻗다가 어느 순간 가지를 비스듬히 세우고는 새끼손톱만 한 자홍빛 꽃을 피우고는 능선을 지나는 바람에 향을 실어 인근 벌들을 부른다.
그 벌들에게 자신이 정말 정말 어렵게 마련한 꿀을 내주고는 자기 분신이 이제 다른 바위틈에서 자라나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백리향 꽃에서 한 번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깊은 향기가 나는 이유는 그 척박한 시간의 많은 상처들을 이겨낸 인고의 과정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리향의 꽃말도 '향기'와 '용기'로서 두 가지나 된다. 향기만이 아니라 용기까지! 절벽 바위 위에 자리하여 세상 어느 꽃보다 깊은 향기를 내는 백리향, 왜 이 꽃에게 어울리지 않는 두 꽃말을 동시에 헌사되었는지 공감이 된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 올 한 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나? 인공 향수로 나를 포장한 향기? 아니면 예수의 상처 자국인 옹두리에서 나는 향기?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바울의 외침으로 다가오는 우리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16:33) 힘든 중에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즐겁고 경사스러운 일들로 위로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함께 즐거운 길, 어려운 길, 버거운 길을 함께 가게 될 것이다. 올 한 해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이 바울의 고백 속에 당신의 향기를 남기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끝 날까지, 내 삶의 마지막 날까지 그 향기로 살자 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호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