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31. 18:2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우리에게 신앙은 기적이었다. 믿음이 없었고 성실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딴생각을 가지고 살았음에도 믿어지니 말이다. 그러니 신앙은 은혜요 그저 주신 선물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이후로 그 믿음은 자라가야 했다. 그렇게 자라가는 우리 믿음을 통해 신은 역사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신의 관심사도 거기에 있다. 믿음의 삶, 그 의지적 삶을 통해 신은 오늘도 당신의 기적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이전에, 우리의 눈은 사물을 보았다. 그 눈으로 세상 기준의 값어치를 따지고 그 기준으로 비교하며 정죄하여 왔다. 사람을 봐도 그 속 사람을 보지 못하였기에 늘 즉각적이었고 단정적이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살게 된 이후부터는 사물뿐만 아니라 그 속의 뜻과 의미도 본다. 신의 통치를 보는 것이다. 영의 눈이요 이해의 눈으로 뒤에서 일하시는 신을 보고 느낀다. 어느 때보다도 힘든 오늘날, 우리의 뒤에 역사하시는 그분을 깊고 넓게, 그리고 다방면으로 느껴보자.
요셉처럼
파라오의 꿈은 풍년을 나타내는 7년과 흉년을 나타내는 7년을 암시하였다. 그런데 같은 7년일지라도 좋은 것 보다 흉악한 것이 더욱 강력하였다. 늘 그렇듯, 현실에서 악은 선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 악이 오면 선의 기억은 사라진다. 흉년이 너무 심하였기에 풍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급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급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창 41:25~31)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닥쳐 올 흉년을 대비한다. 풍년의 때, 잘 나갈 때에도 방종하지 않는다. 잘 나갈 때 오히려 더 성실히 대비하여 흔들리지 않는 삶을 다진다. 통상, 다지고자 맘 먹으면 그 결심의 강도에 따라 방해 받기 마련이다. “결심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방해하는 공격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결심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심각하게 온다. 오죽하면 '작심 3일'이라는3일 말까지 있을까? 교회를 다니려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려니 정말 방해가 많다. 그렇다고 공격이 무서워 다지기를 포기한다면 '사단도 건드리지도 않는 볼 짱 다 본 인생'이 되고 만다.
그 공격을 알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대비하며 산다. 알기 때문에, 대비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의 지평까지 넓어진다. 그런 공격들로 영성이 더욱 깊어지니 신의 은혜를 수시로 느끼고 산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갈등하고 믿음이 깊어지지 못함은 대비의 삶, 다지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뒤에서 도우시는 분을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다. 급기야 왜곡된 믿음으로 치닫게 된다.
바울처럼
실제로 바울 당시에 왜곡된 믿음이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왜곡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왜곡된 믿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 사건은 보여준다. 무리들은 바울의 이적 사건, 즉 앉은뱅이 치유 사건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만한 이적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람이 일어났다는 것만 보았지 그 사람을 향한 신의 긍휼은 보지 못한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신의 사랑, 십자가 깊은 사랑의 의미를 모르기는 그 때나 오늘날이나 여전하다. 그 의미를 모르는, 세상의 눈을 가졌기에 왜곡도 쉽게 하였다. 그들 생각에 바나바와 바울은 별나라 존재였다.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고는 그것을 신비적이고 광신적으로 믿어 행하려 하였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 14:8~20)
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와 그의 아들 헤르메스 전설을 떠 올렸다. 어느 날 인간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묵을 장소를 요구했으나 모두에게 거절당하던 중 산골 노부부의 환대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나중에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돌아가 그 노부부에게는 보상을 내렸지만 다른 이들은 홍수로 쓸어버렸다는 전설 말이다. 무리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 전설의 헤르메스와 제우스로 보아 제사를 드리고자 하였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제사를 드려 신의 마음을 달래고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작태는 왜곡된 믿음의 행위들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교적 행위로 진짜 신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 삶이 기적을 만든다
분명, 종교적 행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과 관계를 계약관계로 원하겠는가? 모든 부모들은 자식과 사랑의 관계를 원한다. 어느 부부가 법률상 혼인의 관계 맺기만을 원하겠는가? 그 이전에 사랑이 전제되어야 진짜 부부이다. 신은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지 종속 관계를 원하시지 않는다. 예배 안 드리면 저주받을까 봐서,, 두려워 떨며 드리는 종교의식은 하나님과 하등 관계가 없다. 그런 신앙, 그런 예배가 신을 곡해시키고 사람을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거기까지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위해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쳤다. 하여 그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조금 전까지 신이라고 여겨 제사까지 지내려던 바로 그 무리들이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 14:21)
유대에서부터 온 사람들은 어떻게 무리들에게 돌을 들게 했을까? 왜곡된 믿음은 자신의 것이 무너짐을 못 견디어한다.. 그래서 동지 아니면 적이 된다. 겸손 치도 않다. 자기 오류를 고칠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 세상은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자기 소리를 키우라 부추긴다. 그래서 그들의 경배는 분노로 변했고 돌까지 들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신에게 돌을 드는 사람들이 많다. 기도했는데 원하는 데로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협박도 일삼는다. 믿음이 있다 하나 왜곡된 믿음 가져서 그런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도 그들에게 돌을 맞았다. 그럼에도 계속 복음을 전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고 나는 전할 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은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총리가 된 후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었다. . ‘므낫세’는 ‘잊다’는 뜻인데 그는 무엇을 잊었다는 것인가? 모든 고난과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 사건을 잊었다(창41:51).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한 것이다. 바울 역시 용서하지 않고서는 거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 무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었다. 잊지 않고는, 용서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셉의 둘째 에브라임, 그 이름의 뜻은 '갑절의 축복'이다. 세상은 흉년으로 풍년을 잊게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풍년으로, 감사로 흉년을, 고난을 잊게 만든다. 믿음으로 이해와 용서의 삶을 만들어 갈 때 우리 삶의 의미는 갑절로 풍부해지는 축복을 받는다. 삶에서 풍년을 만들고 신을 향한 기도로 성실을 다하자. 어려움 속에도 사명으로 살았던 요셉처럼, 바울처럼 삶의 의미와 그 영성이 갑절로 풍성해지는 믿음의 능력이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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