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7. 21:3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2500년 전, 신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귀족들이 사로잡혀 갔고 지도자들이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 절망이고 참담한 상황을 예언자들은 그 신학적으로 해석하였다. 그것은 신의 심판이었고 이스라엘은 신의 심판받을 짓을 했다고 말이다.
“어쩌다가 성실하던 마을이 창녀가 되었는가! 법이 살아 있고 정의가 깃들이던 곳이 살인자들의 천지가 되었는가! 너의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는 물이 섞여 싱거워졌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의 무리가 되었다. 모두들 뇌물에만 마음이 있고 선물에만 생각이 있어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과부의 송사를 외면한다.”(사 1:21-23).
역사를 신의 눈으로 해석하였던 예언자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바벨론 포로의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사자가 얼씬 못하고 맹수가 나다니지 못하는 길, 신의 구원받은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이다. 거친 길만 다니던 유대들에게 고속도로와 같은 길이 열린다! 하기야 오래전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셨던 분이니 못할 일도 없으리라. 그러나 예언자가 말한 이 거룩한 길은 실제 길이 아니라 영적인 길이었다.
마른땅, 사막, 황무지
사람들은 이런 땅을 피한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고 살기도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도성이 함락되고 잡혀간 유대인들의 형편이 사막이었고 절망에 빠진 황무지였으며 두려움에 갇힌 마른땅이었다. 그런 상태의 그들에게 예언자는 희망을 노래하였다. 신이 원수를 갚으러 오시니 이제 두려움을 떨치게 되었다고 말이다. 보복하시는 신, 그 신이 복수하겠다면 막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소 과격하고 혁명적인 표현이나 이는 단순히 원수를 갚는다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처한 절망, 두려움이 너무도 처절했기에 치유와 위로의 뜻을 담은 선포였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4~5)
큰 틀에서 보면, 우리 삶 또한 포로이고 볼모이다. 힘 있는 자 앞에 주눅 들어 사니 무릎까지 휘청거려 홀로 서지도 못한다. 생존을 위한 모든 몸부림들이 결국 돈으로 귀착되는 현실, 그 현실의 포로가 되어 우리가 살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면 결국 다 좋게 해석되는 현실이다. 정말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한 자라 인정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가족관계마저 돈이 지배하고 있는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돈의 포로가 되어 사는 인생이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요 절름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돈, 맘몬 중심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그런 현실에 적극 영합하든지 아니면 방관하든지 말이다.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사야 예언자 당시 다수의 사람들이 후자에 속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야 할 텐데, 그 길이 보이지 않으니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냥 사는 데로 현실에 안주하려고 했었다. 사람인지라 힘들면 포기하려 하고 대충 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달랐다.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는 거기서 거룩한 길이 열릴 것임을 보았다. 신실한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이 돈에 의해서 평가되지 않는 세상, 그 하는 일로 존귀와 성품이 훼손되지 않는 세상이 올 것임을 믿는다. 출신나라 때문에, 피부색 때문에, 그 직업 때문에 무시받고 폄하받는 이들에게 그 현실은 사막이요 그 어려움은 황무지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는 날을 소망하며 산다.
그런데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이사야 예언처럼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의 혀가 풀려 노래할 그런 날이 올까? 2500년 전에 선포한 그 예언은 오늘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현실만 본다면 분명 이사야의 예언은 틀렸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페르시아나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의 예언만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이 현실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는 말도 비현실적이고 아무리 기도한들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신앙적으로 산다고 복을 받기는커녕오히려 손해를 볼뿐이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다시 말하지만, 이사야 예언은 묵시적이었다. 그가 선포한 ‘새 세상’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방식의 삶이 완전히 극복되는 세상이었다. 사막과 황무지에서 샘이 터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세상은 현재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세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지금 오고 있다. 다만 그 세상이 오기 전에는 그 완전한 실체를 알지 못할 뿐이다. 그냥 믿는 것이다. 씨앗과 꽃은 비슷하나 질적으로 다르다. 꽃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현실이지만 씨앗에서 꽃의 현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꽃이 나온 뒤에야 그것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예언하는 그 세상, 즉 씨앗이 꽃이 되는 세상은 우리가 아니라 신이 이루신다. 마른 사막과 황무지에 샘이 터지고 꽃을 피우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 뿐이다. 그럼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신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장치 심판으로 완성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신자가 되었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고 있으며 장차 그 실체의 완성을 볼 소망으로 산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신에 의해서 그 거룩한 길이 열린다고 묘사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그 거룩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늘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 삶에 사막과 황무지에 샘이 터지는 사건이었다. 그는 권력이 무서워 할 말 못하는 벙어리가 아니었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장님도 아니었으며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 듣는 귀머거리도 아니었다. 더구나 삶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욕망의 위협을 죽음으로 증명하심으로써 진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오래전 예언자가 꿈꾸었던 그 거룩한 길이 그로 인하여 오늘 우리에게 열렸으니 믿음의 풍요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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