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4. 18:3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신이 모독을 받는 세상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요 집단 명분과 개인 잇속이 다르기 떼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 현실 세상은 옮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은 것같다, '내 편'인지 '저쪽 편'인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풍조들의 만연함, 그런데 그 풍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을 믿는다는 이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으니 그 신이 모독을 받고 있다. 3천년의 전 이스라엘 사회도 그랬었다. 그래서 하늘 양심으로만 살았던 당시 선각자의 개탄이 매일매일 터져 나왔었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미 7:1~4)
한 사회의 망조는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작은 불의와 타협하다 보면, 사소히 여긴 무원칙들이 쌓이다 보면, 그 누적된 세월들이 한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입양된 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두고 세상이 시끄러웠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해라느니, 살인죄로 심판해야 한다느니, 말들이 많다. 더구나 그 양부모가 독실한 신자였다 하여 분노가 더하였다. 정말 그 부부는 신자였을까? 아니, 신을 의식하며 살기는 했을까? 적어도 진짜 신자들은 모든 행위에서 그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시는 신을 의식한다. 그러기에 결코 함부로 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작은 거짓들이 쌓여
예부터 이스라엘 사희에는 5대 제사가 있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속건제. 번제는 동물 제물을 불태워 바치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도모하는 제사이다. 여기까지는 자원 제사로서 의무가 아니었다. 원하면 누구나 드릴 수 있는 제사였다. 하지만 속건제와 속죄제는 다르다. 자원제가 아니라 의무제였다. 그중 속건제는 타인 물건 침해 시 발생된 손해에 20%를 더해 보상하고 난 후 드리는 제사였다. 그러니까 120%의 보상을 한 후에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가 하면, 속죄제는 더 특별했다. 모르고 지은 죄까지도 뒷날 깨닫게 되면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부지중에 지은 죄는 가벼운 죄이고 의도적으로 지은 죄는 크고 심각한 죄이다. 하지만 성서는 달리 말한다. 부지중 지은 그 죄가 사소할지라도 반드시 신 앞에 자복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였다. 섬세한 신앙 양심으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선민들의 윤리관이었던 것이다. 그 영적 예민함을 위해 오늘의 신자들도 예배를 드리고 성서를 읽으며 기도하는 생활 시스템을 유지한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는 <진짜 휘발유>이다. 가짜를 진짜같이 만들기 위해서 가장 많이 넣어야 하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하면, 아무리 진짜가 많다 해도 그 안에 가짜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전체가 가짜라는 말이다.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적은 양의 가짜이다.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도 이런 점이다. 많은 양의 진짜가 아니라 적은 양의 가짜를 조심해야 한다. 새빨간 거짓말만이 거짓말인가? 충분히 정직하지 못함도 거짓인 것이다.
이 사망에서 벗어나야
기도하고자 눈을 감으면 참담함을 느낄 때가 많다. 온갖 것들로 뒤섞인 나 자신이 보기 때문이다. 내 속엔 선만이 아니라 악도 함께 있었다. 떳떳함이 있었는가 하면 부끄러움도 있었다. 무엇이 진짜 나이고 가짜 나인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실존, 그 사망의 상태가 바로 나였다. 그러니 탄식만 나온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보편화되는 부조리에 여전히 침묵할 것이고 내 욕심을 이루려 악에 악을 더할 것이다. 그러면서 죄의식도 못 느끼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 137:8~9)
참으로 읽기 불편한 시이다. 시편에는 이런 탄원과 불평의 시들이 많다. 시 69편은 불평을 넘어 적나라한 복수심을 드러내고 있고 시 137편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자기들을 포로로 끌고 간 바빌론에게 원초적인 분노감를 위의 시처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편을 성경으로 읽어도 될까? 믿는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될까? 복수하고 싶은데 정말 그것을 말해도 되나? 하지만 그래서 성서가 신의 말씀이다. 성서가 성서인 이유는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신 앞에 선 인간의 욕망과 적개심을 날 것 그대로 전하고 있기에 더욱 성서다운 것이다.
우리의 은밀한 사연을 다 아시는 그분에게는 비밀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니 그 분 앞에서의 불평과 저주의 시들은 인간의 몸부림이었고 희망이었다. 은밀한 비밀은 쌓이는 만큼 인간을 병들게 하기에, 깊은 분노와 미움을 감추고 있다면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공동체를 훼손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기에, 삶의 어둡고 부정적인 실체들은 신 앞에 쏟아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비뚤어진 내면이 치유를 받고 상처 난 내상이 회복을 받는다. 야훼께서 용서의 속죄제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신의 형상을 회복해야
실제로 시편의 탄원 시들은 이런 회복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다윗 왕이었다. 그런 처지에서 분함과 참담함을 야훼 앞에 토설하였었다. 그 결과는 회복이었다. 자신이 탄원하여 신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심을 노래하였다. 회복된 신의 형상은 다른 이들도 치유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다. 회복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삶으로도 보여준다. 그렇다. 야훼가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의롭다 하신 이는 야훼이시니 누가 정죄하겠는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제가 율법을 법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1-24)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신을 속일 수는 없다. 자신을 속일지언정 야훼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은밀함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반드시 온다. 바울의 말처럼, 스스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악이 넓고 깊게 행하여 지고 있다. 앞과 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이들 때문에 신의 거룩하신 이름이 모독을 받는 오늘날이다. 하지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내 안의 아픔과 분노와 미움을 토설하자. 신 앞에 다 토해내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그 치유가 나를 살리고 우리 공동체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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