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7. 22: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굳이 사람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나? 오히려 사람인 요한이 신이신 예수에게 세례를 받는 게 마땅하잖은가? 사람을 대하는 신의 자세와 신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가 서로 다르니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당연했다.
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사람을 대하는 신의 자세
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는 솔직히 오래전부터 그랬었다. 신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니 과정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바로 결과로 말하면 될 것을. 그러니 신이라 하잖은가? 그런 신을 믿기에 그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프리미엄이 작용한다고 믿어왔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이다. 큰 어려움 없이도 성공하고 험한 과정 없이도 최고가 되게 해 주신다고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대하는 신의 자세도 정말 그럴까? 신의 말씀이라는 성서는 분명하게 그렇지 않다고 증거한다. 성공하고 싶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라고! 좋은 친구를 얻고 싶으면 네가 먼저 그의 좋은 친구가 되라고! 결과를 얻고자 과정을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끝이 좋으면 과정이 다소 부조리하더라도 다 미화될 수 있다는 궤변들은 성서 증거와 거리가 먼 헛소리요 사이비들이나 하는 말이다. 요한을 찾아와 굳이 세례를 받겠다는 메시야 예수의 의지,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신의 자세였다. 그런 자세였으니 사람으로서 40일 광야 시험을 받으셨고 급기야 십자가까지 지셨다. 요한이 세례 행하기를 거부하니 메시아가 말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3-17)
메시아가 세례 순간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세례 후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는 시각적인 현상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청각적인 현상이 그것이었다. 바울도 이전의 사울이었을 적에 이런 같은 현상을 경험하였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기독교인 박해 차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하늘로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보았고 그 순간 '왜 네가 나를 괴롭히느냐?'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증언한 것이다.(행 9:1-19).(행9:1-19)
하늘, 그것은 무엇인가?
메시아가 인간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지만 실은 하늘은 열리는 게 아니다. 하늘은 항상 열려 있다. 장마나 폭설 때 하늘이 닫힌 듯 보이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면 열린 듯 보이나 그런 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이지 하늘은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다. 그 열렸다는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비둘는 평화를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비둘기가 성령에 대한 메타포이듯 하늘의 열림도 메타포인 것이다.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로 여겨졌었다. 구약은 물론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되는 주기도문 서두처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도 '주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가 모두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가서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살전 4:13)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0년 전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 줄을 몰랐다. 하늘은 그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이었다. 그 하늘에서 수십 일간 비가 내렸을 때, 노아 홍수 당시 사람들은 그 하늘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그 하늘에 태양이 있으니 태양신을 섬겼고 그 하늘에 별들이 있으니 별점을 치는 점성술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태양이 지면 세상이 캄캄해졌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고대인들은 몰랐다. 그들에게 하늘은 신비의 원천이었다. 분명, 당시 사람들의 물리적 지식은 오늘의 우리보다 짧았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오늘의 우리들보다 더 깊고 탁월하였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와 시골의 늙은 농부, 두 사람 모두 각기 나름의 세상에서 진지하게 살았다면 지식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의 눈으로 보기에 농사꾼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물리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모두 바닷가의 모래 한 알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서 기록자들은 물리적 지식이 부족했지만 근본에 대한 생각은 깊었다. 그들이 생각한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하늘이라는 말로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메시아는 하늘의 문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생명의 비밀한 장소였다. 생명,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비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완전히는 모른다. 여전히 비밀이다. 그 비밀한 생명 안에 우리가 들어왔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왜 생명 안으로 들어왔는지, 또 생명 밖으로 나감은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어린 날부터 중년까지 살아온 이 세월이 무엇인지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부부로, 친구로, 수많은 우연이 겹쳐야만 일어날 이런 신비와 비밀은 땅의 경험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늘은 이런 모든 비밀이 놓여 있는 곳이었고 궁극적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가 세례 순간, 그 하늘이 열렸다. 예수를 통해서 숨겨졌던 생명 비밀이,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곳이 열린 것이다, 그 하늘은 열려야만 우리가 볼 수 있었다. 그 문을 열은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 시시 2:7을 인용한 마태의 이 언급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니 그가 신의 속성과 능력을 그대로 받으셨다는 말이다. 신의 속성과 유업은 생명이었다. 그러니 예수가 생명의 아들인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가 신의 창조 사건에, 그 완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영생 가능성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신의 자녀, 또는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라 한다.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들의 인생관은 땅을 보며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차원이 다르다. 신의 자녀들은 부자 되고 건강하게 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정말 잘 살고 건강하고 성공함이 목적이라면 굳이 신을 믿을 필요도 없다. 믿지 않아도 돈 잘 벌 사람은 잘 벌고 건강할 사람은 건강하다. 신실한 삶을 살아도 망하는 사람이 있고 병들기도 한다. 새벽 기도회를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신자들도 많다. 이런 문제들은 신앙에서 본질이 아니다. 생명은 다른 차원의 삶이다. 그것은 메시아로 주어지는 영생이다. 이런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과 관계가 없고 환경과도 무관하다.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품격 있는 삶을 원하는가? 하늘을 보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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