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3. 12: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기를 원하노라”(창28:1~4)
야곱과 에서 이야기는 창세기의 중심 이야기이고 모세오경의 핵심 주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긴 종교분쟁의 원인으로도 읽힌다. 두 형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경쟁하고 싸우자 걱정된 어머니 리브가가 기도 중에 물으니 하나님이 설명이 이러하였다. "두 민족이 네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 구절을 근거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 싸운다. 유대교 뒤에 태어난 기독교는 유대교를 이겼다 말하고 기독교보다 늦게 태어난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를 이겼다고 말한다. 세 종교 모두 자기네가 아브라함 언약의 유일한 상속자라고 내세우며 지금도 싸우고 있다.
1. 거짓과 탐욕
에서는 성장하여 용감한 사냥꾼으로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주로 장막에 거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사랑하였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편애하였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에서가 사냥에서 지쳐 돌아와 야곱이 만든 죽 냄새를 맡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상황을 이용한 야곱은 형에게 흥정하였다. ‘죽을 줄 터이니 맏이의 권리를 달라’ 그가 요구한 장자의 권리는 아버지 유산을 두 배로 가지는 권리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권리였다. 에서는 개의치 않고 넘겼다. 장자의 권리가 넘기겠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내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창세기 27장을 보면, 에서는 여전히 맏아들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파서 눈앞의 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넘기겠다는 말에서 그는 말의 무거움을 생각하지 않은 경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의 두 번째는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이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탈취하는 장면이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할 지경, 즉 죽음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가장이기에 유언을 남기고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를 정해 그를 축복해야 했다.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큰아들 에서에게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면 죽기 전 마음껏 그를 축복하겠노라 말했다. 이 말을 리브가가 엿들었다. 천막이 얇아 비밀 대화가 어려웠던 때였고 이삭 또한 자기 유언을 아내가 듣도록 했을 것이다. 리브가는 죽어가는 남편을 속이고자 하였다. 야곱을 불러 아버지의 말을 일러주었는데 하지 않을 말까지 덧붙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는 말을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다"라고 전하였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덧붙인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이다.
그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였다.그도 아버지를 속일 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였다. 위장을 하고 어머니가 만든 별미로 눈먼 아버지 앞에 다가간 야곱,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마쳤느냐' 묻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작은 아들이 공모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팔며 아버지의 축복권을 가로챈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동원해 거짓으로 받는 이 축복이 정당한 축복일까? 적어도 야곱에게는 세 번이나 진실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 이삭이 세 번이나 의심을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아버지가 세 번이나 의심하여 물었고 진실을 말할 기회를 주었으나 야곱은 끝까지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였다.
2.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호세아 예언자는 야곱의 이런 행위를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호12: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속여왔는데 그 속임수의 대표적 보기로 조상 야곱을 들어 비판한 것이다. 야곱은 '발뒤꿈치는 잡은 자'라는 뜻이고 '속이다'는 동사 '야켑'과도 발음이 유사하다. 호세아 예언자가 보기에 야곱은 속여서 이긴 사람이었고 불쌍한 도피자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거짓으로 받은 축복을 옳게 여겼을까?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함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라' (창18:19) 했던 하나님이었기에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101:7) 하여 거짓에 대하여서는 단호한 하나님이었다.
그럼에도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은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 축복의 요지는 첫째로 재물이고 둘째로 권력이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는 사실을 알고 슬피 울며 자기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속았다는 사실에 아버지도 충격으로 몸을 떨면서 한탄하였지만 고대사회에서 아버지의 축복은 회수할 수 없었고 철회할 수 없었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하였다. 정말로 큰 아들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에서에게 가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에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야곱을 정말 사랑했지만 이 편애로 인해 결과, 아들과 헤어져야 했다. 이 사건으로 형제간 살기를 느낀 어머니 리브가는 이삭을 설득하여 야곱을 먼 곳 외삼촌 라반 집으로 보내야 했다. 야곱에게는 '네 형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했지만 이 이별로 이후 다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였다. 외삼촌 집으로 도망한 야곱은 거기서 22년을 지냈고 우여곡절 끝에 큰 부자가 되었다.
이제 대규모 식솔과 가축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는 소식에 야곱은 두려움에 빠졌다. 너무나 겁나고 걱정이 되어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세웠다. 우선 상당량의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자기 일행을 두 무리로 나누었다. 한 무리가 몰살당하면 혹여 다른 남은 무리라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날 밤 창세기의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홀로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 것이었다. 결국 요추 관절까지 손상 당하며 새 이름을 얻는 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야곱과 씨름한 이는 대체 누구였을까? 호세아는 그를 '천사였다 (호12:5)'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그가 하나님이라 믿어 그 장소를 '브니엘', 곧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야곱과 그 후손의 새 정체성을 알려주는 열쇠이다.
3. 진짜 축복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주는 경우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는 소명의 신호이다. 야곱은 더 이상 '발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긴 백성'이란 의미의 '이스라엘'이 되었다. 새 이름의 뜻은 그에게 연이어 벌어지는 놀라운 사건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형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22년 전이었고 동생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이후 둘은 서로 보지 못했다. 형 에서는 경솔하고 성질 급하며 폭력적인 인물이었을까? 그런데 야곱이 만난 형 에서는 단숨에 자기에게 달려와 목을 감싸고 입을 맞추며 울었다. 야곱도 따라 울었다. 그런 에서에게는 어떤 분노나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곱으로서는 형 에서의 행동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해후 장면에서 에서가 어떻게 나올까에 집중하다 보니 야곱의 행동이 더 이상함을 놓치게 된다. 사실, 야곱은 매우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야곱은 먼저 에서 앞으로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절을 하였다. 그의 모든 가족도 마찬가지로 행동하였다.
세 차례나 야곱과 그의 가족이 그렇게 절했다. 사용한 언어도 이상했다. 다섯 번에 걸쳐 에서에게 '나의 주님', 두 번이나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 하였다. 이는 전날 밤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을 받은 사람이니 이제 누구에게도 엎드릴 필요나 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리브가가 태에 품고 있을 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예언도 있지 않았던가? 이는 이삭의 축복 '너는 네 형제들을 다스리고 네 어머니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은 꿇을 것이다' 와도 맞지 않는다. 이 예언과 축복이 참이었다면 오히려 에서가 야곱에게 절을 해야 했고 에서가 야곱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당신의 하인'이라고 낮추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22년 만에 둘이 만났을 때 그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 놓쳤던 중요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아버지가 야곱에게 준 두 번째의 축복이 있었다. 그 축복은 첫 번째 축복과 달랐다. 어머니 리브가가 라반에게 야곱을 보내자고 했을 때 이삭은 동의하고 먼 길을 떠나는 야곱에게 이렇게 축복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8:3~4) 처음 축복은 재물과 권력이었지만 두 번째 축복은 '언약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들을 다섯 차례나 약속했던 언약이었다. 즉 처음부터 재물과 권세는 언약과 상관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이스라엘의 길이 아니었다. 이삭으로서는 야곱에게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너'라는 그 두 번째 축복이 진짜 언약축복이었던 것이다.
결론
돌이켜 보면, 야곱의 인생 전반기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태 안에서부터 싸웠고 에서가 먼저 나가자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욕망을 이루려고 눈먼 아버지를 속이는 거짓말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야곱은 에서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가로챘던 축복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은 그를 위해 다른 복을 예비하고 있었으니 언약 백성으로 사는 하늘의 복이었다. 22년의 세월 동안 자기 것이라 고이 간직해 왔던 빼앗은 축복, 이제는 그 축복이 향했어야 했던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야곱, 그러니 전날 밤의 얍복강가 씨름은 자기 실존적 진실과의 싸움이었다. '과거에는 네가 에서가 되려 싸웠으나 이제 너는 너 자신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 '과거에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으려 싸웠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손을 잡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자기 고유한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 거기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히1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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