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 22:3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이 탕자 비유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라 단골 설교자료로, 문학과 예술에서도 종종 재연되곤 한다. '탕자'란 '물을 흐리게 한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야기인즉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모두 받아준다는 이야기로 해석되어 선포되어 왔다. 하지만 예수의 많은 비유 중 가장 긴 이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었다. 그 아들을 따뜻하게 품은 아버지가 주인공이고 더 실질적 주인공은 이 비유를 듣고 있던 당시의 청중이었다. 죄짓고 온 아들 같은 이들이 아니라 그런 자식을 용납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큰 아들 같은 이들에게 들으라는 비유였던 것이다.
1. 바보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들은 예수를 못마땅했다. 자기들이 쩔이 딱지를 붙인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땅의 사람들'이라 부르며 어떤 접촉도 금기시 하였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 그들의 손님이 되거나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도 금지했다. 엄격한 바리새인은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반대로 ‘죄인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는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이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4-6절) 그리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들려주었는데 누가에만 나온다. 작은 아들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반부(11-24절)와 큰 아들에 관한 내용인 후반부(25-32절), 대체로 우리들은 후반부에 나오는 또 하나의 아들에 주목하지 않았다. 고대로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서먹하다. 특히 고대 아버지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도 있었다. 당시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소유했고 그 자식들의 결혼도 임의로 결정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갑자기 요구하였다.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몫을 지금 주세요"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함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모욕으로 그 경우 보통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자식과 의절한다.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충고의 글이 있다. "아들이건 아내건 형제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권력을 양도하지 말라. 네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가 오거든 네 재산을 나누어 주라."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 자식을 위해 아버지가 자기 생명을 주었다는 뜻이다. 바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그러나 쾌락의 삶은 한순간이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악재까지 닥치는 것이 인생이다. 작은 아들 삶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인인 그가 이방인에게 고용살이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추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돼지를 치게 되었다’ 즉 배교의 죄까지 범했다. ‘이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주검에 닿아도 안 된다’ (레11:7-8)
2. 냉정한 큰 아들
작은 아들은 지금 가족만이 아니라 토라, 율법으로부터도 멀어진 삶을 살았다. 결국,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개고생, 생고생 끝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 과정을 묘사하는 누가는 굳이 '회개'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부모는 자식이 집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 자식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이 아버지도 아들이 지평선 위에 나타난 순간 즉시 알아보고 달려가 입을 맞추었다. 고대 청중의 관점에서 보면 이 아버지는 여전히 바보이고 명예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보통의 가부장적 유대인 아버지들은 절대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끝내기도 전에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기까지 하였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려고도 하였다.
왜 갔는지, 그리고 왜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고 징계도 없었다. 오직 '내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라는 자세였다.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외친 아버지는 잔치를 열고 동네 사람로 즐거워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그렇고 그런 하나의 해피 엔딩 스토리였다. 그러나 갑자기 큰 아들이 등장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큰 아들은 아마도 중년의 사내였을 듯하다. 아버지 일을 잘 감당하였고 그 까닭에 동네에서 성실한 사람이라 인정도 받았을 것이다. 소처럼 일만 하느라 그날도 집안에 잔치가 벌어진 것도 모르고 밭에 있었다. 집 가까이 돌아와서야 무슨 일인지 전후 사정을 알게 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잔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한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큰 아들에게 손을 내민다. 가부장 사회에서 이는 아버지의 굴욕일 수 있다.
그럼에도 큰아들은 동생의 처신과 자기를 비교하며 아버지에게 비아냥거렸다. 말속에는 그가 평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나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고 동생을 '내 동생'이라 하지 않았다. ‘당신의 이 아들’이라 부르는 큰 아들의 말투에는 오만과 냉정함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의 뼈 있는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여러 해 순종함이 효심과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었고 부득이한 의무에 근거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예수의 긴 비유는 아버지의 이런 다정한 말로 끝난다. 큰 아들을 ‘얘야’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들에게 냉담히 거리를 두었던 고대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다. 작은 아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부둥켜안고는 입맞춤을 거듭하는 모습에서, 큰 아들을 살갑고 친밀하게 부르는 그 음성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3. 측은지심의 하나님
화가 <렘브란트>는 이 비유 그림에서 둘째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을 그려 놓았는데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굵은 손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같이 가늘고 긴 손으로 그렸다. 그림에서 큰아들은 옆에서 미동도 않고 냉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서 있다.아버지는 그 큰아들을 기쁨의 잔치에 초대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고도 말해 주었다. 이 말에는 '누구에게도 부족하지 않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엿보인다.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아 모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누군가가 집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하다. 더 많은 포도주, 더 많은 노래, 더 많은 잔치가 있는 큰 잔치와 같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이 잔치를 '못마땅해' 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함이 마땅하다‘
과연 큰 아들은 아버지가 배설한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을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말과 유사한 부분이 구약에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에브라임이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하였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긍휼'인데 이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 긍휼이라 할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그 자식을 기다리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식들은 알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뉘우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식을 용서하였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영원히 짝사랑하는 존재이다. 하나님도 그런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등을 보였던 그 순간에도 한결같이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가 뉘우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였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나니’ (애3:22)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을 우리가 닮을 수는 없을까? 오늘의 우리들 가정, 사회,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들이 저마다 신은 오직 자기편이거나 자기들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속의 강박적인 자기 의에서 벗어나 다른 이를 수용하는 자비의 공간이 생긴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복이 있음은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잃었던 것을 찾는 분이다. 예수는 ‘잃은 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사람도 자기의 잃은 것을 되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더 기뻐하겠는가? 우리는 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겠는가? 아니면 살아 돌아온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형이 되겠는가? 성경의 비유는 여기서 끝이 난다. 이 비유의 3막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부터 우리가 써나갈 차례이다. 세상 단 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여 생명을 한 가족,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우리의 오늘이 되기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3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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