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0. 16:3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7:12~16)
러-우 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1년이 지나면서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민간인들이 생사를 달리 하고 있는가? 모든 인간들이 평화를 원한다. 그리고 안전하기를 원한다.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치더라도 전쟁이 없는 곳에 사는 이들은 그 평화와 안전을 누리고 있는가? 물론 성경에서도 평강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평강은 전쟁이 없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상태를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 화해되어 그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말한다.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준 메시아 언약, 그 영원한 다스림 아래 놓인 상태인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앞에 닥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이다. 몸과 영혼을 영원한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던 당시는 로마가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시대였다.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를 외치던 때였다. 이 제국 이념의 매력은 그 요구하는 황제숭배만 따르면 평화를 누릴 수 있음에 있었다. 이미 로마로 세계가 평정되었기에 전쟁도 없었다. 그러니 예수만 믿지 않으면 구태어 박해받을 이유도 없었던 시대였다.
1. 가짜 평화
그런데 그렇게 유지되는 평안, 평온이 진짜 평화였을까? 미국의 유흥도시 라스베이거스에는 좀도둑들이 없다고 한다. 마피아들이 자체 치안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가운데 기분 좋게 와서 돈을 많이 잃고 가야 하는데 좀도둑들이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그 도시들은 평화롭다. 그런 것이 평화라고 세상은 우리를 속인다. 하지만 그것은 거미가 자기 먹이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 그 먹이가 사랑스러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그런 거미의 배려에 속아 평안히 거미줄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면 그 나중이 어떻게 될까? 로마 제국주의가 주는 무사안일과 평화는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케 한다. 그것이 사탄의 숨은 공격이다. 그런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사도 요한이 진짜 은혜와 평강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당시의 로마로 상징된 사탄의 공격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요한의 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가 세 가지로 나온다.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 진짜 왕 중의 왕‘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시89편 인용이기도 하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 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시89:37)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 (시89:27) 당시 교인들은 요한의 이 구절을 들으면서 즉각 이 시편을 떠올렸기에 평강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한 용사를 도와주고 백성 가운데서 선택한 한 사람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나는 내 종 다윗을 찾아서 내 거룩한 기름을 부어 주었으므로 내 손이 그를 붙들어 주고 내 팔이 그를 강하게 할 것이니 원수들이 그를 이겨 내지 못하며 악한 무리가 그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의 대적들을 그의 앞에서 격파하고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쳐부수겠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것이며 내가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겠다. 그의 통치를 지중해로 뻗게 하고 그의 다스림이 유프라테스 강으로 뻗게 하겠다. 그는 나를 일컬어 '내 아버지, 내 하나님, 내 구원의 반석' 이라고 할 것이다' (시89:20-26) 그들이 그리워하는 그 다윗의 왕국처럼 메시아가 와서 다윗의 언약으로 약속되었던 그 나라 완성을 강조하고자 요한은 이 시편을 인용하여 예수를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언약이 있다. 그것은 다윗에 대한 나단 예언자의 언약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에 대한 언약이었지만 ‘그 나라와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는 이 이야기는 명백하게 예수에 관한 메시지였다. 그 나라, 즉 솔로몬의 나라가 정말 그렇게 되었던가? 이스라엘은 BC 931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대로 갈라졌다. 그러다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망했고 BC 586년에 남유대도 망했다. 그 이후,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서기까지 2000년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언약은 무슨 언약이었던가? 메시아 도래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가 와서 이기고 하늘 왕위에 올라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표현한 언약이었다는 말이다. 이 언약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그들, 그래서 자신들이 다스릴 천년왕국을 기다리고 있다.
2. 증인과 예언자로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오역이었고 이 언약에 대한 곡해였다. 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었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그가 왔고 하나님 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여기 ‘이겨내라’는 요한의 말에서 수신자들이었던 교회들이 평강을 얻을 수 있었다.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 땅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라는 표현, 이는 예수의 역할과 지위, 그의 이 땅에서의 세 직분이었던 선지자, 제사장, 왕에 대한 묘사였다. 그는 하나님을 증거 하였고 하나님을 보였으며 그 하나님의 그 말씀을 전하였다. 구약에서 그 역할은 선지자들이었다. 즉 예수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암시했던 바로 그 선지자였다는 말이다. '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리니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신18:18) 예수가 그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 역할을 완벽하게 다 하였다.
충성된 증인으로의 삶이 쉽지는 않았다. 결국 수난당하고 한참 젊은 나이에 죽었다. 늘 반대하는 사람들, 회유하는 사람들,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사람들, 때리는 사람들, 배신하는 사람들, 배척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을 공격한다. 그 예수가 승천하면서 교회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행1:8) 교회를 당신과 똑같이 증인으로 부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삶이다.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당시로는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그 삶, 그 고난을 예수가 앞서 미리 당하고 갔다. 그럼에도 증인으로의 삶이 정말 힘들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의 원하는 길이니 용기를 내라고, 그 길이 맞는 길이라고 사도 요한이 당부하고 위로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이 증인과 선지자로 부름 받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나로 먹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불평하기 시작했다.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가 그립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며 각기 장막 문에서 울기까지 하였다. 그때 모세도 하나님께 불평하여 말했다. ‘도저히 못해먹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고기 달라고 저렇게 웁니다. 아니, 제가 저들을 낳았습니까? 제가 왜 이런 불평까지 들으면서 고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네 짐이 많이 무겁구나, 그래. 내가 고기를 먹게 해 주겠다. 그들의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먹게 해 주겠다.. 그리고 너도 네 짐을 나눠질 70명의 장로를 선택하라 ‘ 이에 70명 장로를 택하여 성막으로 갔는데 거기서 성령이 임하니 70명 장로들이 예언을 하였다. 그 광경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금지를 요청하였다. 그때 모세가 한 말이 이것이었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께서 주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11:29)
3. 결국 이길 싸움에서
신약에서는 이 일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났다. 그날 그 성령 강림으로 모두가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원어 ‘마르투스’는 ‘순교자’라는 뜻의 어원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살아감에 죽음도 불사하는 각오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언자, 증인으로서 삶에 고난과 핍박은 불가피한 이유는 악의 세력 사탄이 끊임없이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믿음의 강도를 희석시키려고 우리의 삶을 염려와 탄식과 눈물로 흔들어 댄다. 하는 일을 꼬이게 하고 건강을 치기도 하며 자식으로 격동시키기도 한다. 그럴 때 충성된 증인으로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냈던 예수, 그 예수도 그 길을 갔다. 이미 앞서서 겪고 이겨낸 예수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그가 죽었다가 살아남에서 ‘죽었다’ 함은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음이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 그는 아들이었지만 고난을 당함으로써 복종을 배웠다. 그리고 완전하게 된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히5:8-10)
예수 당신이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이었다. 제사가 완전하지 못하면 제사장은 즉사했었다. 그러니 그의 살아남은 그의 드려진 제사가 완전했음을 말한다. 예수가 우리 죄 때문에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 구원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인 그가 살아남으로써 완전한 제사가 드려졌고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는 표현은 그 예수가 맏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로 시작하여 나중에 살아날 자들도 있다는 뜻이니 바로 우리들을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이 장자 개념은 출애굽기에서 나왔다. 이스라엘을 건지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 마지막에는 애굽 장자들을 다 죽이되 어린양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살아남았다. 여기 장자는 남자를 대표, 남자는 가족을 대표, 그러니 장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에서 살려낸 이스라엘의 장자를 모두 당신의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구별된 장자들은 모두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그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가 그 일을 대신하기로 했으니 그들이 레위 지파였다. 레위지파가 대표로 하나님을 섬김은 그들의 섬김이 이스라엘 전체의 섬김이었다. 그리고 땅의 임금들 머리가 되었다. 당시 교인들은 로마 황제의 권세 앞에 떨고 있었으나 요한은 사람의 영혼까지 다스리는 진짜 왕을 언급했던 예수의 말을 상기시켰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마10:28) 혈통상으로도 예수는 왕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은 신분이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 족보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을 거쳐 엄연히 예수가 언급되었다. 신앙 때문에 세상 삶이 힘들 수 있다. 악의 세력들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까지 죽이지는 못한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왕, 그가 우리 편이다. 그가 이 우주를 다스린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 삶에서 문제를 제거해 주기 위해 예수를 보낸 것이 아니고 또 그런 것 때문에 죽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투하는 자들이다. 악의 세력과 그 안에 젖어 살아왔던 내 옛사람과 싸워나가는 새사람이다. 그런데 예수가 대표가 되어 이미 이겼고 또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의 삶을 살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승리자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으니 조만간 우리도 그 자리로 갈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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