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6. 23: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1~6)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악이 만연한가? 그래서 현자들과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그 신의 유무, 또는 그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고 시비를 걸어왔었다. <신은 이것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일부러 막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악한 신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하면서도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이 논증에 오랫동안 교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분석 철학자 플란팅가가 자유의지론으로 이 논증을 반박했다. 신의 개입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반비례한다는 것. 즉, 인간에게 20%의 자유의지를 주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성을 80%로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한다 함은 죄를 짓는 순간 강제로 막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라도 자유의지를 주면서 동시에 안 줄 수는 없다는 것, 이는 마치 각도의 합이 360도인 삼각형이 존재한다, 결혼한 미혼남이 존재한다는 말처럼 궤변이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고 흄의 논증을 따르려면 자유의지 없는 기계적 인간들의 세상이 지금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이라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근거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나? 성경의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기 위해 세상의 부조리를 허용하였다. 결국 모든 세상의 악과 부조리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함에서 나온 결과인 것이다.
1. 무디어진 전투 감각
마지막 때가 될수록 마귀는 총력으로 하늘 자녀들을 압박한다. 하나님 또한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전한다.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큰 성길, 즉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에서 죽는다고 말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의 삶처럼 교회도 그 예수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열심히 전도하고 늘려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목표가 아니다. 세상 핍박에 손해 보고 양보하며 밀리는 공동체로 살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했듯이 교회도 그 후의 영광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악과의 최종 한판전쟁으로 묘사되어 온 성경의 아마겟돈, 그 전쟁은 마지막 날 어느 때에 한 번 있는 전쟁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사는 매일의 생활에서 크고 작은 전투로 그 전쟁은 진행되고 있다. 다만 마지막 그 어느 때에 최종 영적 전쟁은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삶은 그 전쟁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고 그 정도는 각자의 신앙 성숙도에 비례한다. 안타깝게도 이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의 현장을 오늘의 교인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니 삶에 영적 전투 감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어차피 사탄의 편에서 사탄처럼 살고 있다면 그 삶에 무슨 거룩한 전쟁이 있겠는가?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고민하는 이들, 제대로 하늘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심각한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 북한 기독교인들, 회교권에 있는 기독교인들만 영적 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핍박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교회가 있음은 우리도 동일한 핍박과 전쟁을 치러야 함을 반증한다. 하나님은 왜 그런 핍박받는 교회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시는가? 영적 전쟁 상태가 그만큼 무섭고 심각한 것임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무서운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신자요 성도이며 하늘 뜻으로 사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2. 마귀의 시험과 악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함은 예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모든 것을 들어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함은 그의 수준으로, 그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는 말이었다. 최소한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하나님이 마음 놓고 들어줄 수 있는 아름다운 기도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인증을 받는 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신중해야 함은 예수를 알아 그의 수준에 맞게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가 직접 가르쳐 준 기도는 그 예수의 소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한다 함은 우리 염원과 소원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소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인 그분이 소원함이 안 들어질 것이 있겠는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하는 기도는 어떤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이루어진 기도인가? 영적으로 그 기도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안전한가? 안전하다. 광야에서 예수가 시험받고 완전한 승리를 하여 천사들의 시중을 받았다. 그 사실이 우리의 승리와 안전을 담보한다. 아담은 실패하여 천사들에게 쫓겨났지만 예수는 시험을 이기고 그들의 시중을 받았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짐승들이 와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런데 광야에 웬 짐승들인가? 그것은 예수가 시험을 이김으로 그 광야가 짐승들도 사는 에덴의 회복을 계시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 잘 믿으면 에덴을 회복하여 그 상태로 산다는 믿고 그렇게 전파한다. 태초에 지어진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넌센스이다. 물론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정말 하나님이 에덴에서 벗겨놓고 사는 것을 구원의 최종 목적으로 삼았겠는가? 우리가 의의 세마포를 입은 하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가?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나님이 우주와 인생과 역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애초 목적은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그래서 창세기의 에덴에는 시럼의 선악과가 있지만 예수로 인해 그 시험이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가 없다. 선악과가 있는 그 동산으로 다시 돌아간다? 예수가 그 시험을 이길 때 우리도 거기 있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 역시 그 예수 안에서 시험을 모두 이겼다.
3. 전투는 진행 중
그러면 당연히 그 시험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인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 나를 위해서이다. 우리 현실을 보라. 내 삶의 실존이 어떠한가? 매일매일 시험에 지고 있지 않는가? 겉으로만 보면 우리는 그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대적으로 서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현실이다. 마치 마귀의 편처럼 매일 욕망하고 실패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지니 우리는 그분이 원하는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 가겠지만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욕심 제어와 시험에 실패하면서 산다. 그러니 외양상 사탄의 편으로 분류되어도 할 말 없는 처지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간다. 이 순간도 사탄은 우리를 열심히 공격하고 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이제는 칼이나 총의 위협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성을 동원해서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 공학박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 이런 질문을 하였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없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육체를 갖고 계셨다. 질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천국은 삼층 천, 그러니까 저 우주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200만 광년, 광년은 빛의 속도로 1초에 30만 km로 달려 1년. 예수는 지금 빛의 속도로 가고 계셔도 안드로메다 성운까지도 못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는가? 정말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가?> 이 도발적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도 아울러 창조하였다. 그런 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따라서만 달려야 하는가? 인간들 수준이 이 정도이다. 어떻게 해서든 신을 부정하려 안간힘을 쓰는 마귀에게 오염된 인간들의 죄성일뿐이다..
정말 과학이 인류를 부요하게만 해주었던가? 본래 과학과 문명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 분야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만들고 발전시켜 온 것이 과학이요 문명이었다. 예전에는 번개가 치면 신 앞에 벌벌 떨며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는 순진함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과학과 문명으로 세련된 인간들은 이제는 피뢰침을 만들어서 꽂아 놓고 하나님을 조롱한다. 홍수가 나서 논밭이 잠기면 신 앞에 겸허해지고 겸손해지던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둑과 댐을 만들고 물길을 바꿔가며 ‘스스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과학이 정말 인류를 부요케만 만들어 줄까? 아니다. 과학은 우리를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신앙을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과학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으로 하나님을 밝혀 보겠다 함도 언어도단이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 너머에 계신 분,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다.
결론
그럼에도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 이성을 자극하고 유혹한다. 어설픈 이성은 종교 다원주의를 만들었고 자기 이해범위 안으로 하나님을 제한했다.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때 무너졌음에도 사탄은 그 이성을 또 자극한다.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기원전 5세기의 피타고라스 정리도 아직 이해 못 한 우리들, 그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겠다고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한다. 과학과 문명과 이성이 우리의 죄성을 자극하여 시험에 들게 할 때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에 따라,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열려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하게 된 이들은 축복받은 존재들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 주기도문 안에 모든 들어있다. 예수가 기도로 소원했던 것, 그가 다 이루어놓은 것, 그것이 주기도문이다.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떠올리며 우리의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여 천국 백성으로서의 그 신분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기도하자.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1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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